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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모음

오늘 우리가 헤어질 수 없는 이유 / 동목 지소영




 

찬비 돌아드는 거리에
머뭇거림 없이 걸었습니다
사랑이라는 말 
꺼내고 보면 무형이 되고 마는 것 
그래서 침묵은 아픔을 동반했고
표현하지 않았던 것들은 
비참한 억지가 되었습니다

안되는 줄 알면서도 
영혼을 투약했고
몸살처럼 도지는 지병 
수도 없이 태운 것들은 
쓸쓸히 내 동글어지고 있습니다
합리와 변명과 비관 
내 당당한 경계 밖이었습니다
외계인처럼
맞지 않는 문법이었습니다

방사선 관통한 줄기에 
녹아버린 피부를 짜깁기하며
죽어간 사랑의 잔재들에 
파란 비타민을 풀 먹입니다 
철없는 비움
바보스러운 동정
흔들린 그 세월은
한 장의 지폐처럼 
무디게 뜯기고 있습니다

사랑은 
화를 내어도 연기를 내어도 
기다리는 것이라 하여  
저만큼 떨어진 곳에서 
애처로이 순복했습니다
바람처럼 지붕을 헝클고 
더디 간다고 수용하지 못하는 앞선 걸음에 
헛되이 짓밟히고 말았습니다
언젠가는 떠난다는 
이별가도 포장한 사치였군요

오늘 우리가 헤어질 수 없는 이유는 
당신의 사랑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지나 
진실이란 진액을 채취하게 되면 
다시 후회 없는 그림을 그릴 겁니다
갈망의 촛불을 켜고 
성경처럼 당신은 나의 신이 될 것입니다 
그때는 혼돈과 머뭇거림은 없을 겁니다

아려오는 한쪽 흉통이 
뒤범벅되어 이제는 내 힘으로 차를 몰 수 없습니다 
사람은 절대로가 될 수 없는 것을요
아무리 좋아도 
아무리 미워도 
좋은 것만큼 미운 만큼 
흥정이 되지 않는 것 있잖아요

잊겠습니다
모질었던 고문
외경스러웠던 선과 악의 미소를.
산기슭 돌아 나온 나무소리 물소리를 
비판하지 않겠습니다  
초보자의 수채화 옆으로 시내길 하나 내어 
마음을 보냅니다
뉘엿거리는 저녁 해 사이로 종소리 걸리면
여행객으로 들었던 
꾸미지 않은 하얀 침대가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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