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와 생명의 증거
살리는 것은 영이니.
나그네의 본향
2022. 2. 8. 15:52
[요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필자가 SNS 위주로 복음을 전하다보니 송구하게도 “목사님이냐?”고 묻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아니라고 하면 전도사님? 장로님? 이렇게 내려가다가 “집사, 그것도 서리 집사입니다” 하면 실망하는 기운이 역력합니다. 안타깝게도 이들은 그 길로 교류를 끊거나 친구 관계를 단절합니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군더더기를 떼기 위해 아예 ‘집사’로 못을 박습니다.
필자를 아는, 교회 오래 다녔다는 집사, 권사님, 장로님에게 복음을 전하면 ‘갑자기 왜 그러느냐’는 표정입니다. 다시 말해 이 집사, 당신이 어떻게 해서 교회 다니기 시작했는지, 그게 언제인지 훤히 하는데 뭘 별스럽게 그러느냐는 태돕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전하는 이는 신학교를 나온 특별한 차원의 전문적 학식을 가진 자라야 한다는 의식이 깔려있습니다.
[요 6:41]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42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복음을 전하자면 하늘에서 내려온 떡, 하늘 양식인 진리의 말씀은, 잠자는 자를 깨우는, 죽어있는 인간을 살리는 오직 하나의 절대적 요소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난생 처음 듣습니다. 듣기는 듣지만 내용은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어려운 얘깁니다. 그것도 성경에 능통한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사, 대제사장이 아니라 신학교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 성경을 가르치는 것과 거리가 먼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유대인들이 예수의 말을 듣는 가운데 그의 아버지가 누구이며, 직업이 무엇이고 가정환경과 출생의 내력은 어떠하며,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너무도 잘 안다는 분위기입니다. 철없는 어린아이 시절, 코흘리개 때의 모습이 연상되었을 수도 있고 목수로서 아버지의 일을 도울 때의 장면이 오버랩 되면서 자기 영역이 아닌 걸 다루는 예수를 보며 수군거렸을 법한 느낌이 넉넉하게 풍겨집니다.
[눅 4:24]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예수께서,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따지는 특성을 가졌다는 걸 너무도 잘 아시기에 하신 말씀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와 인간적으로 가까운 사람들은 “네가 지난 여름에 했던 일을 알고 있다”는 식이기 때문에 그걸 뚫고 나오기가 어렵습니다. 실제, 필자가 육신의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아내는 여전히 만만한 남편으로 보고, 부모님은 내 손으로 키운 자식이라는 게 걸림돌로 작용하여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어떤 집사님과 장로님은 “이 집사, 교회 얼마나 다녔어요? 나는 40년 넘게 다녔는데, 나도 처음에 이 집사처럼 그랬어요”합니다. 이 말투에는 자신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것과 시간이 지나면 열정이 식어 자신들처럼 된다는 의미가 묻어납니다. 그러나 복음은 한 때 불처럼 타다가 사그라지는 게 아닙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건 하나님의 영이 임했다는 것이고 그 후로부터는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걸 모르고 있습니다.
[고후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한 목사님은 “집사님, 제가 입학을 주선할 테니 신학교에 가셔서 좀 더 체계적으로 공부해 보시면 어떨까요?”합니다. 그래서 “목사님, 잘 아시다시피 예수를 비롯한 제자들은 학교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지만 하나님에게 직접 배운 이들입니다”고 하지만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때와 시대가 다릅니다”하는 답변이 건너옵니다. 하나님이 필요한 이에게 임하여 직접 가르치신다는 걸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요 6:45]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앞서 열거한 사례들은 진리의 말씀이라는, 하나님의 생명을 전하는 복음을 인간의 지식에 의한 이해와 수긍과 납득이라는 수준으로 끌어내려 누구나 선택할 수 있는, 각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종교화시킨 ‘자기복음’의 현주소입니다. 내 안으로 찾아오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가로막고 있는, 이 ‘자기복음’이 만들어지는 주된 근거지는 건물 교회입니다.
사람의 마음과 육신의 생각이, ‘다녀야 하는 교회’ ‘나가야 하는 교회’에 갇힌 이들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어렵습니다. 이들의 하나님은 저 하늘 어딘가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내 밖’의 하나님입니다. 내 밖에 하나님을 두고 있는 이들은 자신을 ‘생명’으로 인식합니다. 자신을 생명으로 인식하는 인간은 하나님과 자신을 이인칭으로 구분합니다. 하나님과 하나 돼야 하는 걸 모르기 때문입니다
[골 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영(프뉴마)이신 하나님과 합쳐지기 위해서는 혼(프쉬케)인 내가 은혜의 세례로 죽어야 합니다. 단순히 머리에 물 찍어 바르는 형식적인 세례가 아니라 궁창 위의 물인 말씀이라는 생명수에 빠져 익사하는 죽음, 육신은 생명이 아니라는 깨달음입니다. 이렇게 죽은 자를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된 자’ ‘그리스도 안에서 일으키심, 살리심을 받은 자’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난 자(고전15:44)라 합니다.
오늘의 본문 또한 같은 맥락이며 성경의 모든 내용이 이 한 절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예수께서 “살리는 것은 영(프뉴마)”이라 하십니다. 인간에게는 없는 하나님의 영, ‘성령’입니다. 다른 말로 보혜사, 말씀의 영, 진리의 영, 그리스도의 영, 계시의 영이라고도 합니다. 육(사륵스)에 불과한 너희, 짐승인 너희, 육신으로 잠자는 너희에게 진리의 말씀을 담아 하나님의 생명인 프뉴마(영)로 살리겠다, 창조하겠다 하시는 겁니다.
육은 무익하니라에서 ‘육’으로 표현된 헬라어 ‘사륵스’는 ‘살코기’ ‘동물의 고기’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혼(프쉬케)이나 육(사륵스)이나 다 같은, 생명이 없는 개념으로 쓰입니다. 인간끼리 존엄이니 인격이니 할 뿐 복음으로 대변되는 진리의 말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인간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시각은 이처럼 우리와 너무도 상반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에서 이른 말, 전하는 말, 이 ‘말’은 헬라어 ‘흐레마’입니다. 육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이라는 겁니다. 육의 몸을 벗지 못한 자들은 들을 수 없기에 이해할 수 없는 영의 말, 너희를 살리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너희에게 선물로 주고자 하는 게 바로 이 ‘흐레마’의 영적인 생명인데, 너희가 관심이 없다고 하십니다.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인간에게 주어진 육신의 유효기간이 만료되기 전에 멸망하지 않는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주어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하고자 하시는 그의 사랑을 만나야 합니다.
[렘 3:15]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한 목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눈에 보이는 소망을 말하는 자, 이 땅에 대한 얘기를 하는 자는 목자가 아니라 이리입니다. 눈에 보이는 나의 소망이 아니라 육의 몸을 벗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소망, 나의 쉼, 나의 안식, 내 마음, 육신의 편안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쉼, 하나님의 안식입니다. 육에 속한 나를 죽여 영으로 창조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소망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고 그가 나를 가르치는 일을 쉬시는 안식이 있게 되길 바랍니다.
카리스 에클레시아 이화율 집사
Daegu / 010-3032-82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