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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체험의 내적 인식 (2)

나그네의 본향 2013. 1. 10. 09:42

 

신약성경 안에는 내적 인식을 아주 분명히 말하는 네 군데의 성경구절들이 있다.

앞의 두군데는 희브리서 811절과 요한 일서 227절이다. 이 두 구절은 우리가

사람의 가르침 없어도 내적으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음을 언급했다. 그러나 이

두 구절이 말한 것에는 차이점이 있다. 희브리서 8장은 하나님의 생명의 법,

하나님의 생명의 자연적인 기능이 우리로 하나님을 인식하게 한다고 말하고,

요한 일서 2장은 성령의 계시인 가름바름의 가르침이 우리로 하나님을 인식하게

함을 말했다. 생명의 법에 의해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에 의해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고, 기름바름의 가르침에 의해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다.

 

다른 두 성경구절은 요한복음 173절과 에베소서 117절이다. 요한복음 17

3절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인식한다고 말했다. 이것 또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로 하나님을 인식하게 함을 말한다. 에베소서

117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그분을 알게 한다고

말했다. 이것 또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로 하나님을 알게 함을 말한다.

 

이상 네 군데의 성경 말씀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내적 인식에 하나님의 생명에서

나온 생명의 법과 하나님의 성령에서 나온 기름 바름의 가르침, 이 두 가지 수단이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 속에 이 두 가지 수단이 있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두 방면의 인식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생명의 법은 우리로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하는 면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품은 하나님의 생명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서 이 생명이 운행하고 역사하시어 그 특성을 발휘할 때마다

자연이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므로 하나님의 이 성품을 알게 한다.

 

기름 바름의 가르침은 우리로 하나님 자신을 인식하게 하는 면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기름 바름의 가르침이 비롯되는 성령은 하나님 자신의 체현이기 때문

이다. 이 성령은 우리 안에서 바르면 운행할 때마다 항상 하나님 자신을 우리

안에 바름으로 하나님 그분 자신을 인식하게 한다. 생명의 법과 기름 바름의

가르침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을 내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 여기에서 우리가 말한 내적 인식이다,

 

율법과 선지자들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에 대한 이 두 방면의 인식을 작은

그림자로 보여주는 것이 있다. 그것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밖으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을 인식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율법과

선지자들이다. 우리는 구약의 특징이 율법과 선지자들임을 알고 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시고 선지자들을 세우신 목적은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분을

인식하게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과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으로 하여금 그분을 인식하도록 그들을 이끄신 두 가지 도구로서, 이 두 가지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두 방면의 인식을 가질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그들을 이끌어 그분의 성품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본래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에서 나온 것으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과 미워하시는 것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신 것은 다 하나님의 성품이 기뻐하고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금지하신 것은 다 하나님의 성품이 미워하는

것들이다. 그 예로 하나님은 질투하는 분이시므로 우리에게 우상 숭배를

허락하지 않으셨고, 하나님은 사랑하는 분이시므로 그들에게 살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으며,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들도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셨고, 하나님은 성실한 분이시므로 그들에게 성실함을 요구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성품을 따라 그러한 율법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율법

전체가 하나님의 성품을 말해주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중 어떤 것은 하나님의

광명을 말해 주고, 어떤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말해 주고, 어떤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어떤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해 준다. 하나님은 율법의 각 조항의

요구와 금지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분의 성품과 각 방면을 알도록 인도하셨다.

 

하나님이 선지자를 세우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분 자신을

알도록 이끌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구약의 선지자는 인격 있는 하나님

을 대표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하도록 그분이 세우셨기 때문이다.

선지자들이 한 말은 하나님 자신의 뜻을 쫒아 그들에게 주신 계시와 인도이다.

예를 들어, 모세는 하나님이 세우신 선지자이다.(18:15) 그가 이스라엘 백성

에게 알린, 회막을 건축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실 그 일에 관한

계시이고, 그가 이스라엘 백성으로 광야를 가도록 인도한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광야에서 걷도록 인도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지자들의

각종 계시와 인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인격 있는 그분

자신을 인식하도록 그들을 인도하셨다.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에서 나온 것이므로 율법의 성질도 변하지 않고

고정된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성품은 변하지 않고 고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은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고

말했다. 이것들은 개정할 수 없는 고정된 법칙으로서 이 사람에게나 저

사람에게나 동일하고 예루살렘에 살아도 그렇게 해야 하고 사마리아로

내려가도 그렇게 해야 한다. 결국 사람이나 일이나 시간과 장소가 바뀜으로

인해서 변해서는 안 된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의 이 규정들은

기꺼이 받았다면 그들은 그것들을 통하여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성품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들 자신의 생활 방식과 성질과 냄새도 하나님의

성품에 부합될 수 있게 된다.

 

한편 선지자는 하나님 자신을 대표하며 특정한 때에 하나님의 뜻을 말해냈기

때문에 선지자의 활동은 고정되거나 제한 된 것이 아니라 융통성이 있고 변할

수 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자기의 뜻을 쫒아 행하시는

분이시므로 유동적인 분이요 한정된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지자는 사람에게

어떤 때에는 이런 계시를, 어떤 때에는 저런 계시를 줄 수 있으며, 이곳에서는

사람에게 이런 인도를 주고 저곳에서는 저런 인도를 준다. 그러므로 율법이

사람에게 준 계시와 인도는 유동적이고 제한이 없는 것이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의 계시와 인도를 기꺼이 따랐다면 그것들을 통하여 인격 있는

하나님 자신을 알고 하나님의 그 당시의 뜻을 알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그들 자신이

걷는 것이나 멈추는 것이나 일이나 전쟁이 모두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었을 것이다.

 

생명의 법과 기름 바름의 가르침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들도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했지만,

그들이 율법의 규례로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선지자의 가르침에 의해 하나님

자신을 안 것은 밖의 인식이지 내적 인식이 아니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그분의 생명을 지닌 그분의 영을 우리 안에 두심으로 그분에 대한

내적 인식을 갖게 하셨다. 우리로 내적으로 그분의 성품을 알게 하는, 그분의

생명에서 나온 생명의 법은 구약의 율법을 대신하였고, 우리로 하여금 내적으로

그분 자신과 그분의 뜻을 알게 하는, 그분의 성령에서 나온 기름 바름의 가르침은

구약의 선지자를 대치하였다. 이제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자세히 보기로 하자.

 

a) 생명의 법

 

지난 장에서 우리가 거듭 말했듯이 생명의 법은 생명의 자연적인 특성과 기능이다,

생명의 특성은 생명의 성품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의 법이 우리 안에서

그 성능을 발휘하며 우리를 규제할 때에는 항상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고

하나남의 성품을 알게 한다. 이러한 인식에는 밖의 지식의 가르침이나 의문의 율법이나

형식의 규정이 필요 없다. 이러한 인식은 내적인 생명의 법이 우리에게 주는 자연스런

느낌이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아기의 입에 쓴 것을 넣어주면 뱉어내고 단 것을

넣어주면 삼킨다. 아이가 단맛과 쓴맛을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생명의 자연적인기능에서 나온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갖 구원받고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사람은 범죄 하기를 싫어한다.

이것은 그가 죄의 형벌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그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의

거룩한 성품이 자동적으로 그로 하여금 죄를 미워하고 귀찮아하며 상합할 수 없다는

느낌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느낌은 양심의 정죄보다 더욱 깊은 것이다.

우리는 바로 죄를 미워하는 어떤 느낌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알게 되었다.

마치 고린도의 바울이 믿는 이들에게, “ 우리가....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고전 4:11-13) 라고 말한 것과 같다.

 

바울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안에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하는 하나님의

생명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의 성품이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렇게 하나님의 생명안에 살 때 하나님의 성품을 만지며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되었다. 거룩함과 사랑과 성실함과 빛 등 하나님의

생명의 성품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시간과 장소의 차이가 없이 항상 변함없기

때문에 그분의 생명의 법의 성질도 변하지 않고 고정된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생명의 법이 운행하심으로 우리로 만지게 하는 하나님의 성품은 항상

변함없이 항구적인 것이다.

 

우리로 하나님을 알게 하는 생명의 법이 우리 안에 운행하신 결과는 우리의

생활방식과 성질과 맛이 다 하나님의 성품에 부합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만

 밖의 규정으로 사람의 밖의 생활을 하나님의 성품에 부합되게 한는 구약의

의문의 율법과는 다르다. 우리의 성품 속에 하나님의 성품의 성분이 있으므로

점점 하나님의 성품과 똑 같이 되어 하나님의 성품이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은 우리의 성품도 사랑하고 미워할 수 있도록 내적인 생명의 운행하심

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의 성품 속에 섞는 것이 신약의 생명의 법이다.

 

이제는 과거의 숨은 부끄러움과 더러움의 일을 할 때마다 안에 있는 생명의

법은 우리이게 막힘과 편치 않음과 자연스럽지 못함과 불안을 느끼게 한다.

반면에 빛과 거룩함과 하나님의 성품에 부합되는 일을 할 때에는 우리 속에

생명과 평강을 느끼게 된다. 이러므로 우리의 생활은 자연히 속으로부터

하나님의 성품에 부합되도록 변하게 된다.

 

b. 기름 바름의 가르침

 

기름 바름의 가르침은 성경 안에 오직 요한 일서 227절에서만 언급되었다.

또한 요한 일서 기름 바름(Aninting)은 명사나 동사가 아니라 동명사로서,

관유(명사)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바르는(동명사) 활동을 가리키기

때문에 기름부음의 가르침을 기름바름의 가르침이라고 번역한다.

 

그렇다면 기름 바름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구약의 예표와 신약의

성취를 볼 때, 성경 안에서 관유는 항상 성령을 가리킨다. 관유가 성령을

가리켜 말한 것이므로 기름 바름은 분명이 성령의 운행하심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운행하심은 연고와 같이 우리를

바른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러한 운행하심을 기름 바름이라고 부른다.

 

기름 바름은 우리 안에 성령의 운행하심이므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도록 자연이 우리 안에 느낌이 있게 한다. 기름

바름이 우리로 이렇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는 것이므로 우리

안에서 우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러한 가르침을 기름

바름의 가르침이라고 부른다. 기름 바름은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운행하

심이므로 그것은 곧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 자신의 운행하심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체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그분이 운행하시고 바르시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과 성질도 제한될 수 없다. 어떤 때는 우리에게 이런 가르침도

주고 또 어떤 때는 저런 가름침도 준다.

   

그분의 생명의 법은 그분의 생명의 고정된 성분에서 나온 것이고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생명의 고정된 성품을 만지게 하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의 이 율의 기능도

고정적인 것이다. 그러한 그분의 성령의 운행하심은 무한한 그분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며 무한한 그분 자신을 만지게 하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의 이 운행이

우리에게 주는 가름침도 무한한 것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그분에 대한 각종 계시를

얻게 하며 그분의 각종 인도를 받아 무한량한 그분 자신과 제한 없는 그분의 뜻을 알게 한다.

 

기름 바름과 그분의 가름침은 무한한 하나님 자신에 이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각종 계시를 인도하심이므로, 그곳은 우리 전존재의 행위와 행동과 움직임과

선택이 다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게 할 수 있다. 이것은 다만 밖에서 사람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행동을 하라고 하는 구약의 선지자들과 다르다.

이것은 성령이 우리 안에서 관유로서 하나님 자신의 성분을 우리 속에 발라

우리로 하여금 안에서부터 하나님 자신을 만져 하나님 뜻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의 행동뿐 아니라 우리의 전존재가 하나님 성분으로 가득 차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한다.

 

그러므로 생명의 법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의 성품을 만지게 하는 것으로서

우리 속에서부터 하나님의 생명의 성품은 규제해 내고, 기름 바름은 우리로 하나님의

인격인 그분 자신을 만지게 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인격인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바른다. 우리 안에 생명의 법의 이 끊임없는 운행하심과 기름바름의 가르침이 있으므로

우리는 범사에 사람의 가르침 없이도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생활방식과 취향의

문제를 만질 때마다 생명의 법은 그러한 일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알려주며, 행동과 선택의 문제가 있을 때마다 기름 바름의 가르침은 그러한 일에서

하나님의 자신이 어떻게 느끼시는가를 깨닫게 해 준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옷을 사러갈 때 사는가 사지 않는가의 여부는 행동에 있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문제이기 때문에 기름부음이 우리를 가르치며 인도한다.

상점에 가서 옷을 살 때 어떤 모양과 색깔을 택하는가는 하나님의 성품의 취향문제와

관계되기 때문에, 생명의 법은 어떤 모양과 색깔이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한 것인가를

느끼게 한다. 사러가야 하는가 가지 말아야 하는가의 인도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어떤 때는 사러가야 하고 어떤 때는 사러가지 말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양과

색깔을 선택하는 취향은 항상 변하지 않는 것이고 언제 사더라도 똑 같다.

 

또 예를 들어, 한 쌍의 형제자매가 결혼 날짜를 어느 날로 정할 것인가는 행동에서

인도를 받는 문제로서 하나님의 성품과는 무관하다. 초하루나 보름에 결혼해야

하나님의 성품에 부합되고 다른 날에 결혼하면 하나님의 성품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행동에서 인도를 받는 문제이기 때문에 기름 바름이나 성령의

운행하심이 결정할 것이다. 결혼할 때 어떤 옷을 입어야 하며 장소를 어떻게 장식하며

어떻게 집회를 안배해야 하는가 하는 성질과 취향과 방식이 하나님의 성품에 맞는가의

여부와 성도의 체통에 맞는가의 여부는 다 하나님의 성품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기름 바름이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법이 경험하는 것이다.

 

c 양자의 관계

 

생명의 법과 기름 바름의 가르침이 다르고 그들의 기능도 차이가 있지만

그것들은 서로 긴밀한 인과관계를 가지며 나눌 수 없는 것이다. 지난 언급

에서 본 바와 같이 생명의 법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나왔으며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의 영에 있고 하나님의 영안에 포함되기 때문에 이 법은 생명의 영의 법

(8:2)이라고도 부르며 성령의 한 법이기도 하다. 이 법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나오고 하나님의 생명에 있지만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집행된다. 또 하나님의

성령의 운행하심은 곧 기름 비름이다. 그러므로 이 법의 기능은 바드시 기름

바름을 쫒아 나타난다.

 

언제든지 기름 바름이 멈출 때 이 법의 기능도 사라질 것이다. 이것은 기름 바름과

생명의 법의 기능이 참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나눌 수 없는 것임을 알려준다. 동시에

기름 바름의 가르침은 생명의 법에 대한우리의 이해와 관계된다. 생명의 법은 생명의

자연스러운 기능이므로 우리 안에서의 이 법의 운행은 다 생명의 느낌에 속한 것이다.

이 생명의 법에 의해 우리의 깊은 곳에는 재촉하거나 금지하고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느낌이 있을 뿐 그 느낌의 뜻을 이해할 수는 없다. 우리가 그 느낌의 뜻을 이해할 수

있으려면 기름 바름의 가르침이 필요하다. 오직 기름 바름이 우리를 가르칠 때만이

생명의 법이 우리에게 준 느낌이 무슨 뜻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설탕과 소금을 처음 맛본 아이는 그의 속에 있는 생명의 자연스런 기능으로

단맛과 짠맛의 차이를 감지할 수 있을 테지만 그 두 가지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후에 어머니가 단 것은 설탕이고 짠 것은 소금이라고 알려줄 때 그는 양자의 맛의

차이를 감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양자가 무엇인가도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고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어떤 형제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운다면,

그것들은 그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의 성품과 맞지 않기 때문에 그가 그런 일을 버릴

수 있을 때까지 하나님의 생명의 성품이 그의 안에서 타당치 않음과 불안함을 느끼게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생명의 성품의 기능이 그로 하여금 감지하게 하는 그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일을 하는 것이 타당치 않다고는 느끼지만 타당치 않은

원인을 알지 못한다. 성경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기름 바름이 그로 하여금

그의 안에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과 맞지 않음을 알게 될 때 비로소 그 타당치

않은 원인을 알게 된다. 이 때 그에게는 느낌을 주는 하나님의 생명의 성품의

기능이 있을 뿐 아니라 그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기름 바름의 가르침도 있게 한다.

그러므로 생명의 법의 기능이 기름 바름을 쫒아 나타날 뿐 아니라 생명의 법의

느낌의 의미도 기름 바름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계시된 것이다,

 

또 한편으로 생명의 법의 운행하심은 기름 바름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관계된다. 체험에서 우리는 기름 바름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이 생명의 성장에

달려 있음을 알고 있다. 우리의 생명의 성장의 정도가 높은 만큼 기름 바름의

가르침을 이해하게 된다. 예를 들면 앞에서 말한 설탕과 소금을 맛본 아이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면 어머니가 그에게 단 것은 설탕이고 짠 것은 소금이라고

알려줄지라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생명이 그 수준에 이르러야 이해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름 바름의 가르침을 이해하려면 생명의 수준이

충분히 높아야 한다. 우리가 기름 바름의 가르침을 더 이해하려면 생명의 수준

이 반드시 증가해야 한다.

 

또한 생명의 수준의 증가는 생명의 법의 운행하심에서 비롯된다. 생명의 법이 우리

안에서 운행할수록 생명의 수준이 더 증가하게 되고 기름 바름의 가르침에 대하여

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생명의 법의 운행하심은 기름 바름의 가르침에

대한우리의 이해를 증가하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생명의 법과 기름 바름의 가르침은

서로 관련이 있을 뿐 아니라 서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이 양자는

이렇게 관계되고 영향을 미치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완전하고 충만하게 알 수 있을 때까지

하나님에 대한 내적 인식을 갈수록 증가하게 한다.

 

d, 양자의 비교

 

우리는 생명의 법과 기름 바름의 가르침이 어떻게 다르고 또 서로 어떻게 관련되며

영향을 미치는가를 이미 보았다. 이제 이 양자가 우리에게 주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간단히 비교하면 더욱 분명해질 것인다. 기름 바름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영 그 자신의

운행하신이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는 적어도 세 종류가

있다. 첫째, 우리로 하나님을 알게 한다. 이는 우리로 하나님 자신을 만지게 하고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을 얻게 하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한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우리의 행동에서

우리에게 주신 인도하심을 이해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작은 인도와 큰 인도,

종류로 나뉜다. 작은 인도는 우리의 일상생활 속의 일반적인 인도이다. 큰 인도는 주님의

일과 계획에서의 특수한 인도이다. 앞에서 우리가 말한, 옷을 사러 가야 하는가, 어느 날

결혼해야 하는가 등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의 작은 인도이다. 허드슨 테일러 형제가

중국 내륙에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느낌같은 것은 주님의 일에서의 큰 인도이다.

 

셋째로, 우리로 진리를 알게 한다. 이는 우리로 진리에 관한 계시를 얻게 하는 것이다.

이것도 작은 것과 큰 것의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작은 계시는 믿는 자가 믿지 않은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것이나(고후 6:14)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는 것들을 보는 것과 같은, 우리 사람의 행실에 관한 것이다.

큰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비밀(2:2),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기능(1:23)

등을 보는 것과 같은, 하나님이 계획에 관한 것이다

 

우리기 이것들은 본 후, 생명의 법과 기름 바름의 가르침이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주는

인식은 참으로 풍성하며, 우리 안에서의 하나님의 모든 역사를 포함한다. 이 두 가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하여 완전하고 충만하며 철저한 인식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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