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갈대(생명)의 척량..

[스크랩] 광야는 훈련받는 시간이요 장소

나그네의 본향 2013. 1. 22. 12:09

<제 9강>    광야는 훈련받는 시간이요 장소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철저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4는 창1장의 4째 날에서 온 숫자인데 광명인 율법을 상징하여 ‘엎드려지다’(죽음, 항복)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0은 충만(완전)입니다. 즉 율법을 준수함으로 하나님 영광에 이르려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도저히 엄위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죄인임을 자각케 하여 ‘완전히-부복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광야의 40년 길은 거듭난 모든 자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시간적인 길이를 말함이 아니라 내면에서 변화된 상태를 뜻하는 말인 것입니다. 이 기간에 42번이나 장막을 옮겨 다녔습니다(민33). 애굽의 영역에서부터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인 JX께로 가는 여정인 것입니다.


이 42번에 대한 영적해석은 마1장에서 신약을 여는 마태가 했습니다. 부르심을 입은 때(아브라함)부터 14대를 3번 거쳐서 그리스도까지 42대입니다(14x3). 즉 충분하고도 완전하게(10) 죽음(4)을 경험하는 십자가의 3일 길을 통해 새로운 피로물로 변화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42에서 4는 죽음이요 2는 탈바꿈이니 새 하늘과 새 땅으로의 존재적 변화를 중복해서 말하고 있지요.  


그런데 마1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마지막 단락인 바벨론에서 예수 그리스도까지가 13대입니다. 그럼 남은 한 대는 누구입니까? 맏아들의 영을 받은 그리스도인인 각자 자신을 나타내고 있답니다. 마1장은 JX의 족보이면서 그 족보에 나를 끼워 넣는 하나님의 경륜이 숨겨져 있습니다(마태=하나님의 선물). 가롯유다는 이 광야의 여정에서 낙오자가 되었지만 대신하여 맛디아(마태의 히브리적 발음)는 제자에 합류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맛디아가 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신 것입니다. 


거듭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는 왕다운 실력과 기품을 갖기 위해서 그야말로 왕자의 수업을 받게 됩니다. 광야생활을 통해 옛사람은 끝나고 새사람으로 재창조되면서 그는 어느새 요단을 건너게 되겠지요.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를 예외 없이 징계하시며 혹독하게 다루십니다. 만일 자기에게 징계가 없다면 사생자라 했으니 각자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반대로 자신에게 불시험이 있으면 당연한 수순이니 이상히 여기지 말고(벧전4:12) 오히려 감사하고 찬양해야겠지요. 왜냐고요? 지금 하나님의 인을 맞고 경주에 임한 자격을 갖추었으니까요. 만일 대학 입시-합격자 게시방에 자기 이름이 없다면 얼마나 낙심이 되겠습니까? 하물며 천국 시민권을 부여하는 일인데요...


그러나 이 산지 길은 결코 쉬운 코스가 아니랍니다. 목적은 두 가지-낮추시고 시험하는 것입니다. 과연 낮아질 수 있습니까? 모든 사람은 모두 높아지길 본성적으로 원하고 있습니다. 추앙과 존경까지는 아니라도 그저 ‘괜찮은 사람’ 이라고 알아주는 소원성은 다 있게 마련이지요. 그러나 최소한의 이 미련마저 여지없이 깨드려서 먼지처럼 흩어버리십니다. 이런 일 당해 볼 때마다 가슴이 녹아내리는, 그야말로 물 없는 사막이요 건조한 곳일 뿐입니다.


그리고 시험을 통해 달아보신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다수는 원망하고 불평하며 애굽을 그리워하다가 도중에 다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 처해졌을 때에 하나님을 망각하고 믿음을 저버린다면 자연히 신세타령만 하며 곧바로 영적인 냉담자가 되든지 침륜에 빠지는 자가 되겠지요. 지팡이 같은 갈대로 나의 믿음의 길이와 높이와 폭과 그리고 무게를 항상 가름하고 계십니다(계11:1).


죄인으로 상징된 염소 가죽을 혹독한 광야의 과정을 거쳐 깨끗한 세마포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부분에서는 아주 엄격하십니다. 결국에는 낙오자는 버려두고 이기는 자만 이끌고 가시는 분임을 알아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엘)의 나라는 하나님들(엘로힘)만 살게 마련이기 때문이지요.


출처 : 베다니사랑과 복음- 평신도 교회
글쓴이 : 하늘향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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