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칼을 주러 오신 주님
칼을 주러 오신 주님
<마10:34~39>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주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목적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 오셨다(요일3:8). 마귀가 하는 일 중에서 가장 단수가 높은 일은 ‘짝퉁’을 퍼뜨려서 ‘진짜’의 자리에 앉혀 놓는 일이다. 짝퉁이 무엇일까? 다른 영, 다른 예수, 다른 하나님을 말한다.
원래 개살구는 빛깔이 좋아서 사람들이 속기 쉽다. 미혹의 달인인 마귀가 어찌 이것을 이용하지 않으랴? 그것이 선악과다.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얼핏 보기에 너무나도 그럴듯한 그것에 손을 뻗지 않을 사람 있겠는가? 신이라면 모를까? 인간이라면 당연히 따먹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설계 프로세스이기 때문이다.
선악과의 본 명칭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이다. 선과 악을 아는 것, 좋음과 나쁨을 아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이러한 분별이 없다면 짐승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인줄 알고 빠져버리면 구원이 없으니 문제가 된다. 나무는 사람을 의미하며, 실과란 그의 교훈을 의미하는 것이니, 선악과란 인류역사 대대로 전승되며 발전시켜온 인간사회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윤리와 도덕, 철학과 종교 등을 망라한 정신세계의 모든 사조를 말하는 것이다.
선악과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한마디로 철학이나 이념과 같은 정신세계의 산물이며, 좀 더 높은 단계의 선악과는 영혼을 다루는 종교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창조된 사람이기에, 내면세계의 인격을 다루는 윤리도덕과 영원한 것에 대한 관심은 언제나 지대한 것이고 근본적인 것이다. 육신의 먹고 입는 문제를 초월해서 가장 고상하고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려는 성향과,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갖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이것이 사람의 영적인 속성이다.
마귀는 일은 이러한 사람의 속성을 역이용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서 구원을 받는 일을 방해하는 일이다. 생각을 조종하는 것이다. 철학자들이 만들어 내는 수많은 사고의 개념들이 얼마나 고상한지, 거기에 잡히면( 선악과를 먹으면), 그 사람과 그 사상적 신조가 하나님이 되고 만다. 그러나 사상은 생각의 유형에서 나오는 관념에 불과한 허상일 뿐이다. 관념과 이념(이데오르기)가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자신의 사고의 미궁에 빠져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결론짓고 자살했다.
<롬8:6~7>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윤리와 도덕 강령을 통해 ‘사람다움’을 추구하는 유교는 얼마나 고상한가? 또한 수행을 통하여 해탈(신이 됨)을 가르치는 불교의 교리는 많은 영혼을 사망으로 불러들이는 인본주의 사상의 최고봉이다. 철학가와 각종 종교의 교주들은 대표적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들이다. 수많은 이방 종교가 있는 것은 모두가 마귀가 만들어낸 짝퉁의 흔적들이다. 이러한 종교 중에서 가장 차원이 높은 종교가 유대교이다. 그러나 모든 종교가 그렇듯이 유대교에도 구원은 없다.
모세를 통하여 시내산에서 준 십계명의 목적은, 사람이 율법을 온전히 지켜서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서 구원주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찾게 함이었으나, 마귀의 사주를 받은 인간은 십계명의 독소 조항을 제거한 후 양념(복잡한 규례와 율례)을 쳐서 먹음직한 요리를 만들어냈다. 이것이 유대종교다. 계명의 목적을 교묘히 변질시켜 짝통 중의 짝퉁을 만든 것이다. 타 종교와 달리 유대교는 하나님의 관한 상표권을 가지고 구원 장사를 하니 그 가증함이야말로 하늘을 찌르는 겪이다.
누가 이 태산과 같은 거짓의 견고한 진과 이론(고후10:4~5)을 파하며 깨드릴 것인가? 사도 요한은 계시록5장에서 일곱 인으로 봉한 성경을 떼실 분을 어린양으로 기록하고 있다. 성경의 비밀한 말씀을 열어서 진짜 같은 짝퉁의 전모를 드러내고 고발하며, 율법의 참 뜻을 전할 분이 주님이시라는 뜻이다. 이것은 천지를 개벽시키는 일이요, 인류의 생과 사를 뒤집는 대 역전극이다. 이로 인해 친 아버지로 모시고 살던 앵벌이의 아버지가 납치범 이였음을 온 세상에 밝혀졌다.
유대교의 본거지 예루살렘성은 거짓아비인 마귀의 보좌이다. 마귀는 광명의 천사로 가장해서 자신의 일꾼들을 거짓의 영으로 세뇌시켜 단단한 성벽을 건축해 놓고, 율법의 거미줄을 빽빽이 쳐서 수많은 영혼의 먹이감을 창고 가득히 비축해 놓았다. 어느 누구든지 이 성에 들어오면 독침으로 마비되고, 그들의 양식이 되기 위해 영구히 합성보존 처리된다.
주님은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 이 난공불락의 철옹성을 깨뜨리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성(一聲)이 “이 성이 깨드려지지 않으면 그 안에 있는 돌들이 놓임을 받지 못한다”고 직접적 표현을 하셨다.
<마24:2>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오역)
(원어직역) (예루살렘성이) 깨뜨려지지 않으면 돌 위에 돌 하나도 놓임을 받지 못한다.
*cf: 부정 형용사 ‘메’를 두 번 사용한 문장
마귀의 사상체계, 즉 마귀의 머리가 깨드려져야 그 체계 안에서 견고히 결탁된 영혼(돌)들이 자유와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하 본문은 ~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고 처처에 기근이 일어나는 것이 시작이다”고 답하신다.
민족은 누구며 나라는 어디인가? 여러 가지 교리를 가진 교권과 교파끼리 치고받는 진리와 비진리의 싸움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인용한 마10:34 이하의 말씀도 같은 맥락이다. 주님이 칼을 준다는 말의 의미는, 진리의 말씀(검)을 가르치게 되면 영적 세계 안에서 분쟁이 일어나는 것의 비유이다. 마귀가 만든 짝퉁신앙을 모르고 종교적 열심에 빠져있는 그곳에 진리를 전파하면 영적관계의 아비와 아들, 어미와 딸, 시모와 며느리 사이에 분쟁이 일어날 것이다. 깨닫는 자는 주님 편에 설 것이고, 여전히 무지 속에 있는 자는 주님의 대적이 될 것이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전쟁이 발발한다.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며 견고히 쌓은 종교의 거대한 예루살렘성은 마른 뼈들로 가득찬 사망의 골짜기이다. 여기에 진리의 핵폭탄을 터뜨려서 내분을 일으키면 들을 귀가 있는 자들은 생수를 마시고 살아 일어날 것이다. 이렇듯 진리가 짝퉁 속으로 침투하면 반드시 대립이 발생한다. 만일 분쟁이 없다면 진리가 아니다.
이 전투의 선봉장으로 오셔서 진리 전쟁의 본을 보이신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기 암으로 죽어가는 형제들에게 가서 그 환부를 들어내고 새 생명을 살릴 날선 검을 가지라고 주문하신다.
<눅22:36>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