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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와 생명의 증거

육신에서 난 것과 믿음에서 난 것

 

?육신에서 난 것과 믿음에서 난 것

 

 

 

결단이나 헌신을

요구하는 것은

믿음의 삶이 아니다.

 

진리를 듣고

자연스런 순종이

되지 않는다면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다.

 

믿기 위해서 기도한다거나

의심이 있지만

믿음을 확신하려 한다거나

잘 되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는

믿음에서 온 것이 아니다.

 

그렇게 살도록

힘써 보겠다는 것이나,

꼭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나,

앞으로 열심으로 추구하겠다는

결단이나 각오는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닌,

사람의 의지에서 나온 것으로써

육신의 삶을 의미한다.

 

각오나 결단을

발휘하는 것은

사실상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리 애쓴다 해도

더욱 믿음에서 멀어질 뿐이며

때에 따라 무리한 결정을 내림으로써

그것을 자신의 믿음으로

인정하려 할 것이다.

 

집을 판 돈으로

교회의 어려움을 지원한다든지,

아니면 직장을 옮겨

교회 근처로 이사를 한다든지,

원치 않는 결혼을 한다든지,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오직 예수 이름을 위해

오지로 들어간다든지 하는 것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다.

 

주어진 정상적인 삶을 버리고

마치 위대한 믿음의 결단을

내리는 것 같은 삶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다.

 

물론 사람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고

그것으로 귀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무리한 삶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닌

사람의 의지에서 비롯된

좋은 편을 택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육신의 삶이다.

 

무리한 결정,

또는 앞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며 내리는 결단 등은

육신에서 나는

기대에서 비롯된 것이지

결코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다.

 

믿음이 요구하는 삶은

단 하나다.

율법적 삶을 버리고

자기가 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율법적 삶이란

믿음의 기준을 세워놓고

자신이 그에 따라 살기를

힘쓰는 것이다.

 

곧 사랑이나 용서, 용납,

복음 증거와 같은 기준을 정해 두고

그에 따라 살려하는 것이나

나이가 들어 인생의 마지막을

참된 삶으로 마무리 하기 위해

늦은 신학과 목회의 길을

가는 것도 믿음이 아닌

율법에서 난 것이며,

육신에서 비롯된 죄의 삶이다.

 

지금은 인정할 수 없겠지만

언젠가는 인정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날이 올 것이다.

물론, 죽기 전에 깨달아야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기회라도 얻을 수 있다.

 

믿음의 삶은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자신의 모든 결정권을

그리스도께 맡겨 드리고

오직 그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내어드리고

구원에 이르기까지

참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에 대해 살려는

믿음의 삶이다.

 

자신에게서 난 감정적인 것,

자기 의지에서 난 것,

자기 생각에서 난 합리적이거나

이기적인 판단 조차

그리스도께 맡겨 드리고

그의 인도하심에 따르겠다는 것이

자신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로 살려하는 것이다.

 

오직 그럴 때만이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곧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되어지는 일에

아무런 저항감이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과연 어떤 사람이 그런

믿음의 삶을 살 수 있겠는가?

자기 의지와 판단과 감정으로

행하는 모든 것이

항상 그릇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참된 진리의 삶을

찾고 찾은 결과로써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에게서다.

 

그래서 참된 믿음이나

복음이 요구하는 자기 십자가를

능히 받아들일 수 있고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에

자기를 온전히 내어드릴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곧 믿음의 시작이다.

실제 믿음의 시작은

자기 말세의 때에 시작된다.

곧 자기가 살기를 그치는

때를 의미한다.

 

말세에 대한 그릇된 사고를

고칠 수 있기를 바란다.

사람에게서 난 흉악한 일을 가지고

말세라고 말한다면

말세는 처음부터 시작된 셈이다.

아담의 아들 가인이

하나님이 자기 제사를 받아주지

않았다고 해서

그의 동생 아벨을 죽인 사건에서부터

말세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타락한 육신에서 난

흉악한 현상들이

말세의 현상이 아니다.

그런 일은 처음부터 있었다.

 

 

말세란,

자신의 종말을 보는 일이다.

 

 

그 때에 비로소

예수께 자신의 전부를 드리고

오직 그로 살겠다는 것이

믿음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에게서 난 모든 것이

사실상 죄에서 비롯된 것임을

인정하는 때가 말세이다.

그는 더 이상 자기 육신대로

살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며

오직 그리스도로 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맡겨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의 말세를 만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믿음을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란다.

말세를 만나지 않을 때

믿음을 받아들이면

좀 더디게 되는 것은

아직 자기 안에서

절망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고 인내하며

주의 인도하심을 따르면

자기 말세를 보게 되며

그 때 온전히 자기를 맡겨드리는

믿음의 삶이 시작될 것이다.

 

결단이나 헌신, 각오를

요구하는 것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을 옳게 여기는 것도

믿음에서 난 행동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가 제시하는 요구에

주저하면서도 따라가는가?

 

그 이유는

모두 정상적인 믿음위에

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믿음은

결코 상식을 초월한

무리한 요구를 할 수 없으며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물론 참 믿음도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따르는

결단을 요구한다.

그러나 말세를 만난 자들만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합당히 여길 때와

목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자들만이

그에 응할 수 있을 것이다.

 

뭐든 육신에서 난 것들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다.

육신에서 난 것 중에

유일하게 하나님이 받을 수 있는 것은

자기가 살기를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로 살고자 하는

믿음의 반응 하나 뿐이다.

그 외는 모두 육신에서 난

죄의 삶이다.

 

20.05.09

 

#인조에선교회 #십자가복음

#김윤창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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