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진리와 생명의 증거

다윗과 므비보셋(워치만 니)

 

다윗과 므비보셋(워치만 니)

 

오늘은 구약에서 한 어린 절뚝발이가 왕의 상(床)에 앉아 있는 놀라운 이야기를 보기로 하자. 성경에는 놀라운 일이 매우 많다. 어느 곳에서는 기생이 구원받았다고 말하고 어느 곳에서는 강도도 구원받았다고 말한다. 또 어느 곳에서는 세리나 나쁜 바리새인이 구원받았다고 말한다. 오늘 여기에서는 조금 색다른 것, 즉 한 절뚝발이가 구원받은 일을 보기로 하겠다.
오늘 여기에 앉아 있는 사람 중 성경을 읽어본 사람이 대다수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의리의 친구 이야기를 말할 때 항상 다윗과 요나단을 언급한다. 어떤 문학자들도 친구 사이의 사랑을 말할 때 다윗과 요나단을 언급한다. 오늘 내가 교통하고자 하는 것은 다윗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베푼 은혜와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어떻게 감사했는가에 대해서이다.

 

절뚝발이 므비보셋(4장 4절)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절뚝발이 아들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므비보셋이라 전에 사울과 요나단의 죽은 소식이 이스르엘에서 올 때에 그 나이 다섯 살이었는데 그 유모가 안고 도망하더니 급히 도망하므로 아이가 떨어져 절게 되었더라.』


여기에서 므비보셋의 조부 사울은 다윗의 대적이었다는 사실을 특별히 기억하기 바란다. 사울은 여러 차례 다윗을 핍박하고 죽이려 했다. 그러므로 사울은 다윗의 큰 대적이었던 것이다. 이제 사울과 요나단이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였으므로 므비보셋의 유모는 그의 조부와 아버지가 다 죽었으니 남은 한 아들까지 다윗의 보복을 당할까봐 급히 도망간 것이다. 그러나 너무 급히 도망하였으므로 아이가 떨어져 절게 되었다. 여러분은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죄인의 상태가 아닌가 생각해 보라.


사람들은 하나님을 오해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사람들은 나의 하나님을 오해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 악한 마음을 품으므로 하나님께서도 그에게 악한 마음을 품으시리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하나님을 미워하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를 미워하시리라 생각한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를 미워하는 분이시리라 생각한다. 므비보셋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내 조부는 다윗의 대적이었으니까 다윗은 분명 나를 미워할 것이다. 나는 다윗과 좋은 관계가 없었으니 그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내가 하나님에 대한 느낌이 별로 좋지 않은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까? 내가 하나님을 미워하는데 그가 나를 사랑하실까?』 그러나 내가 말하지만 하나님은 사람과 같지 않다. 므비보셋은 취할 것이 한 가지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결국 은혜를 받았다. 여러분과 나도 하나님에 대해 다 똑같다.

 

므비보셋을 후대한 다윗(9장 1-13절)
『다윗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1절). 오늘날 하나님도, 『아담 이후로 내가 은총을 베풀어 줄 사람이 누구냐?』고 묻고 계신다. 다윗은 요나단을 인하여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로 인하여 죄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오늘날 사람들은 한가지 크게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미워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이 선한 행실을 가져야 하나님의 얼굴을 돌이키시게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분노를 그치게 하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를 기억하시게 하고 기뻐하시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므비보셋에게는 다윗 앞에 설 자격이 조금도 없었다. 다윗은 므비보셋의 아버지 요나단을 알았을 뿐 므비보셋은 선한 행실이 많아서 다윗의 호감을 산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다윗 앞에 설 자격이 조금도 없었다. 다윗은 므비보셋의 아버지 요나단을 알았을 뿐 므비보셋이 누구인지는 몰랐다. 다윗은 요나단을 인하여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었다. 므비보셋은 선한 행실이 많아서 다윗의 호감을 산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다윗 앞에 설 자격이 조금도 없었다. 므비보셋이 은혜받은 것은 스스로 된 것이 아니라 제삼자로 인하여 된 것이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는 것도 이와 같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먼저 좋은 행실을 가져야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아무 연고 없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본래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의 권고를 얻을 자격이 조금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요나단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주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님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일반 대학에는 전공 과목 외에 교양 과목들이 있다. 그러나 사람이 구원받는 일에서는 교양 과목을 거칠 필요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어느 정도 준비되어야 하나님의 마음을 돌아서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한 가지도 할 필요가 없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화목해야 한다고 말씀한 구절은 한 군데도 찾을 수 없고 다만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우리로 더불어 화목을 이루셨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주신 후에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의 아들을 주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주 예수께서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왕이 저에게 묻되 그가 어디 있느냐 시바가 왕에게 고하되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나이다』(4절). 「로드발」은 히브리 말로 「불모지(不毛地)」라는 뜻이다. 오늘의 세상이 바로 로드발이다. 로드발은 영원히 사람에게 만족을 줄 수 없고 목마름을 그치게 할 수 없는 곳이다. 로드발은 당신의 마음을 충족시킬 수 없다. 형제 자매들이여, 여러분은 사람이 자신을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아는가? 하나님에게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은 누구도 만족을 얻을 수 없다.
아마 당신은 장래에 대해 아름답고 안식할 꿈을 가진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 후에는 그 모든 것이 현금으로 바꿀 수 없는 수표임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하나 지나가는 환경은 다만 당신을 낙심케 하고 실망케 하여 당신이 바라던 것은 다만 꿈뿐이요 공중누각(空中樓閣)이요 불모지인 것이 느껴질 것이다. 형제 자매들이여, 하나님이 없는 생활은 만족이 없는 생활이다. 하나님 밖의 생활은 영원히 만족을 얻을 수 없다. 다윗을 떠난 므비보셋은 불모지에 거했고 하나님을 멀리한 죄인도 불모지에 거한다.

 

다윗은 므비보셋이 불모지에 거한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했는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자. 『다윗 왕이 사람을 보내어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저를 데려오니』(5절). 로마서 3장 11절에서는,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라고 말하고, 누가복음 19장 10절에서는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저희같이 나쁘고 타락된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을 찾아야지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우리를 구원하신다면 아마 우리는 영영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스스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므비보셋은 그의 조부가 다윗의 원수였으므로 다윗을 찾아갈 담력이 없었고 자신의 두 발이 다 절뚝발이었기 때문에 찾아갈 능력도 없었다. 오! 므비보셋이 다윗을 찾은 것이 아니라 다윗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찾은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보내어 우리를 찾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신 것이다.


므비보셋은 그의 조부가 다윗의 원수였으므로 감히 왕을 만나러 가지 못하고 두 발이 절뚝발이었으므로 왕을 만나러 갈 능력이 없었다. 우리는 자신의 행위가 조금 좋아지면 하나님을 찾고 그분께 내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절히 구하면 아마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므비보셋이 다윗을 찾은 것이 아니라 다윗이 므비보셋을 찾은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당신을 필요로 하시고, 하나님이 당신을 부르시고, 하나님이 사람을 보내어 당신을 찾으심을 말해주고 있다. 로마서 10장 6절을 보자.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 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여기에서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누구도 능히 하늘에 올라가 주님께 우리를 대신하여 죽어달라고 간구할 수 없고 또한 누구도 음부에 내려가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뒷구절에서는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했다(롬 10:8, 10). 므비보셋은 어떤 노력이 필요치 않았다.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왔다. 오늘날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구하지 않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다윗은 므비보셋을 데려와서 무어라고 말했는가?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서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가로되 「므비보셋이여」하니 대답하되 주의 종이 여기 있나이다.』(6절) 오! 여기에 아주 듣기 좋은 음악이 있다! 「므비보셋이여!」 다윗은 므비보셋을 만났을 때, 『므비보셋아, 너 왔느냐?』,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이여!』,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아! 또는 『네가 누구냐?』라고 말하지 않았다. 다윗이 『므비보셋이여!』라고 말할 때 그의 마음 속에 어떤 느낌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았는가? 다윗은 어떤 음성으로 그 말을 했겠는가? 오! 이 한 마디 속에는 아버지 마음의 어떠함을 나타내는, 뛰는 마음이 있음을 말해 준다. 「므비보셋이여!」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미워하시지 않고 당신을 필요로 하고 계시며,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어떤 사람이 당신의 이름을 부를 때 다른 말을 한마디도 덧붙이지 않는 것은 그 속에 다른 사람이 깨닫지 못하는, 오직 듣는 그 사람만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말이 들어 있음을 뜻한다.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동산지기인 줄 알고 주님께 물었을 때 주님은 『나는 동산지기가 아니다.』, 『내가 시체를 옮겨가지 않았다.』, 『여자인 네가 어떻게 그 시체를 가져갈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주님은 다만 『마리아야!』라고 하셨다. 마리아는 그 친숙한 음성을 듣고 즉시 『랍오니여!』라 했다. 우리가 다 아는 바와같이 어떤 사람의 이름만 부를 때에는 그 말 속에 많은 뜻이 포함되어 있다. 다윗이 그의 대적의 손자를 보고 『므비보셋이여!』라고 부른 것은 그에게 복수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이 없음을 말해줄 뿐 아니라 그의 마음 속에 은혜와 사랑이 가득차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므비보셋은 다윗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그는 만나러 갈 때, 다윗이 그를 죽이지 않을까 하고 마음이 두근두근했을 것이다. 그는 다윗을 만나 므비보셋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을 때 다윗에게 그에 대한 악의(惡意)가 없고 좋은 느낌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두려운 마음이 너무 심했으므로 『주의 종이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과거에 왕의 자손이었던 내가 자신을 낮추고 노예가 된다면 아마 다윗의 환심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다윗이 나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스스로 노예의 일을 하여 하나님의 기쁘심을 얻을 수 없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므비보셋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찌니라』(7절). 오! 형제 자매들이여! 모든 것이 다 준비되었다. 우리 중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어떤 사람은 여러 해 동안 사역을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의 생활에 큰 변화가 올 것이다.


19 세기 때 미국에 기독교를 반대한 유명한 문학가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또한 유명한 신문의 주필(主筆)이었다. 그는 어느날 무디(D. L. Moody)의 전도로 회개하고 주님을 믿었다. 그가 구원을 받자 미국의 많은 신문들이 그 사람이 구원받은 간증을 실었다.
채프만은 어느 날 한 도시에서 그와 같은 호텔의 옆방에 거한 적이 있었다. 채프만은 과거에 그 사람을 알았기 때문에 구원받은 사실 여부를 그에게 물었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저는 무디의 전도로 회개하고 주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18세 때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탕자였습니다. 열 두세 살 때 저는 집에 갇혀 있기 싫어 여러해 동안 집을 떠났습니다. 그러다가 한번은 중병에 걸려 돈을 다 소비했기 때문에 별 방책이 없어 면목없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내게 잘 대해 주셨지만 저는 집에 들어온 것을 후회했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아버지는 이미 나이가 드셔서 백발 인데다가 병든 몸으로 매일 억지로 일하러 나가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항상 번돈으로 빵을 사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버는 돈이 적었기 때문에 식구 셋이 요기하기에도 부족했습니다. 나는 집에 돌아온 것을 후회하고 더이상 아버지의 피땀과 바꾼 빵을 먹을 수 없기 때문에 다시 집을 떠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나는 난생 처음으로 아버지께서 그렇게 근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나에게, 「네 몸이 아직 낫지 않았는데 왜 나가려고 하느냐…집에 빵이 한조각밖에 없고 재산이 아무리 적더라도 네 몫은 있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집을 나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에게 「얘야, 난 일생 동안 돈 벌려는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네가 밖에서 방랑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더 많은 재산을 네게 넘겨주기 위해 돈을 벌 마음이 있다. 장차 우리를 도와 줄 사람이 많이 있을 텐데 왜 꼭 집을 나가려고 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피땀과 바꿔온 빵 먹는 것을 더이상 견딜 수 없었습니다. 잠시 후 아버지는 나에게 「애야, 하나님께서 너를 축복하시기 바란다. 이제 너를 더이상 만날 수 없더라도 하늘에 가서라도 너를 만날 수 있기 바란다!」라고 하시며 나를 전송하러 나오셨습니다. 반 마일쯤 갈 때까지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고 나도 아무 말하지 않았습니다. 일 마일 가량 갔을 때까지도 여전히 아무 말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너무 피곤하여 더이상 걸으실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날 비로소 집을 떠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아버지는 몇 걸음 떼지 못하여 몸을 돌이켜 나를 부르셨습니다. 그분은 눈물을 흘리며 주머니 속에서 50센트를 꺼내어 내게 주시며, 「이것을 네게 주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 50센트가 어떤 돈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 돈은 아버지의 전재산이었습니다. 내 생애에서 나는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던 그때 기온은 내리는 비로 차가왔지만 내 마음 속은 너무도 뜨거웠습니다. 나는 입 속으로 「아버지는 날 사랑하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날 나는 다시는 탕자가 되지 않고 제일 먼저 아버지의 부담을 덜어드리기로 결심했습니다. 나는 돈을 벌어 제일 먼저 아버지께 보내드리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날이 나라는 사람을 변케한 날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전에 나를 사랑하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내가 빈곤할 때 비로소 그분이 나를 사랑하시는 줄을 안 것입니다. 어느 날 무디 씨가 「다른 사람들은 다 아버지의 탕자에 대해 말해왔지만 오늘 나는 탕자의 아버지에 대해 말하겠습니다.」라고 전도하는 것을 듣고서 그 아버지가 내 아버지와 똑 같다는 것을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내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형제 자매들이여, 나는 이러한 하나님을 안 지 오래 되었다고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십 일 년이 되었다. 나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 마음인지를 알고 있다. 당신은 무엇을 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만회하고 그의 기쁨을 얻으려는 생각을 하지 말라.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당신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당신은 무엇을 해서 그의 마음을 만회하려 할 필요없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십자가를 보라.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셨음을 알게 된다. 십자가의 형벌은 마땅히 당신이 받아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 연고로 주 예수님으로 하여금 당신이 받을 형벌을 대신받게 하셨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깊은 사랑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탕자는 아버지를 만날 때,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컫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아직 그와 집과의 거리가 멀었을 때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달려가」. 아! 아비의 이 마음은 죄의 거리를 단축시킨다. 아버지가 그에게 입을 맞출 때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다. 그 아버지는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입을 맞출 때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다. 그 아들은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는 다만 마음으로 『내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신다.』라고 말했을 뿐이다.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의 마음을 오해하지 말라. 십자가 아래로 오라. 예수께서 당신을 대신하여 죽은 것이 당신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말해주고 있다. 주 예수의 피를 볼 때 하나님이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왕이 사울의 사환 시바를 불러서 이르되 사울과 그 온 집에 속한 것은 내가 다 네 주인의 아들에게 주었노니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종들은 저를 위하여 밭을 갈고 거두어 네 주인의 아들을 공궤하라 그러나 네 주인의 아들 므비보셋은 항상 내 상에서 먹으리라…므비보셋은 왕자 중의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으니라』(9-11절).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가! 여기에 조건이나 명령은 없고 다만 약속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는 『너는 무엇을 해야한다.』는 말이 없고 다만 『내가 네게 주리라』는 말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은혜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다면 그분을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