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병을 치료받자
<눅14:1~6>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 주의 앞에 고창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안식일에 병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저희가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저희가 이에 대하여 대답지 못하니라
고창병은 주로 반추동물에서 생기는 병이다. 반추동물은 되새김동물을 의미하는데, 낙타과·애기사슴과·사슴과·기린과·소과의 동물에서 볼 수 있다. 어느 것이나 위(胃)가 4∼5방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애기사슴과는 셋째위가 흔적만 남아 있어서 4개의 방으로 완전하게 나누어져 있지 않다. 이와 같은 여러 개의 위를 반추위라고 한다.
반추위는 먹은 음식물을 넣어두는 큰 첫째위(혹위:rumen)와 벌집과 같은 모양의 벽이 있는 둘째위(벌집위:reticulum), 점막이 주름 모양으로 된 셋째위(겹주름위:omasum), 위선(胃腺)이 분포된 넷째위(주름위:abomasum) 등의 4개 방으로 되어 있다.
첫째위는 4방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 소의 경우 용량이 150∼200ℓ이며, 모든 음식물을 먼저 이곳에 모아둔다. 이 내용물을 토해내서 40∼60회 정도 씹은 다음 다시 삼키는데, 소는 40∼50분 사이에 이 동작을 반복하면서 하루종일 몇 번이고 되풀이한다. 첫째위 속에는 많은 세균이 있어서 셀룰로오스를 분해시킨다. 또 이것과는 별도로 어떤 종류의 원생동물이 존재하고 있는데, 이것을 단백질원으로 이용하고 있다. 씹어서 되돌아온 첫째위의 내용물은 둘째위로 간다.
둘째위에서는 수축이완 운동을 하여 내용물을 첫째위로 보내거나 첫째위로부터 받아들인다. 이 내용물은 셋째위에서 가늘게 부셔져서 넷째위로 이동하게 되는데, 넷째위에서 비로소 위선으로부터 위액이 분비된다.
그런데 고창병이 생기는 원인은 반추동물이 삼킨 거친 풀· 나뭇잎· 열매들이 첫째위에서 다시 입으로 뱉어져 되새김을 하지 않고 막바로 4째위까지 통과하여 장으로 가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렇게 전혀 씹히지 않은 음식물이 장에 오면 소화 장애로 부패되었기에 수분도 흡수가 안되어서 배만 맹꽁이배처럼 잔뜩 부풀어 오르게 된다. 소가 한 번 이 병에 걸리면 치명적이라 한다. 치사율이 매우 높은 위험한 병이다. 창자가 물이차서 북처럼 부풀어 생기는 병이라 해서 고창(鼓脹)병이라 한다.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제물은 정한 짐승이어야 한다. 즉 되새김을 하는 반추동물이어야 하고, 게다가 굽이 갈라져야 한다. 돼지는 굽은 갈라졌지만, 되새김을 안하기에 부정하다. 굽이 갈라졌다는 것은 영과 육을 구분한다는 말이요, 되새김이란 말씀을 듣고 묵상하여 삶에 적용 시킨다는 말이다. 이 둘 다를 만족해야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라 할 수 있다.
약대와 토끼와 사반은 새김질은 하나 굽이 안 갈라져서 부정하다. 영과 육을 구분하지 못하면서 말씀대로 산다고 열심을 내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육적인 열심은 율법종교 행위로 물불을 못 가리는 맹신을 불러온다. 통상 자신을 희생해가며 구제와 사랑과 봉사에 전념하는 것으로 표출된다. 테레사 수녀, 슈바이처 박사, 울지마 톤즈의 이태0 신부, 혹은 밥퍼주는 최태0 목사가 대표 주자들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 이들은 악한 자들이다. 이것이 마치 성경적 사랑인양 하나님을 오해시키기 때문이다.
반면에 진리는 알지만 되새김을 안 하는 것은 더더욱 무서운 병이다. 오랫동안 종교생활을 하다가, 처음으로 성경의 내적인(영적) 비밀들을 접하면 너무도 기뻐서 놀라움에 젖어 산다. 날마다 숨겨진 비밀들을 알아내느라고 다른 일은 뒷전이 된다. 심지어는 집에 있는 아이들 밥 챙겨주는 일도 마다하고 모임에 열심이다. 일주일 내내 듣고 듣느라고 정신이 없다. 더구나 여기서 알아진 지식을 남에게 전달하느라고 또 여념이 없어진다.
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아주 위험하다. 소위 하나님과 주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 하여, 주야장창 말씀은 추구하나 삶에 적용하지 못하면 실제가 없는 공허한 이론일 뿐이다. 진리가 참이 되기 위해서는 성육신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낮고 천한 피조물로 내려와서 인생을 체휼한 수난의 과정이 있어야 실제가 되듯이, 영의 말씀이 자신의 내면세계에서 역동되어 자아를 죽이는 십자가가 있어야 참이 된다.
성령으로 탄생된 주님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요7:39>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생명이신 주님의 성령으로 거듭나서 진리세계 안에 진입한 자들이라면, 날마다의 삶에서 자신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서 처리하며 부활의 삶으로 사는 것을 생명처럼 여겨야 한다. 삶이 없는 지식은 이론이요, 관념이다. 이러한 상태로 지식만 많아지면 가분수가 되어 몸의 균형이 깨진다. 자신은 지식의 허영 속에서 높은 구원을 성취한 것 같지만, 객관적으로 비쳐지는 모습은 가관인 한낱 어릿광대에 지나지 않는다. 뿌리가 없어 생명을 잃은 나무는 몇 시간만 지나면 시들어 버린다.
되새김질은 곧 묵상이다. 진리의 말씀을 들으면 소처럼 조용한 장소와 시간을 내서 곰곰이 되씹어야 자기 것이 된다. 소가 풀만 먹어도 골수가 가득 찬 단단하고 굵은 뼈를 만들어내고, 영양이 풍부한 젖을 낼 수 있는 것은 되새김질에 비밀이 있다. 되새김질은 소화 흡수를 완벽하게 돕는다. 아무리 단단한 억새풀의 셀룰로오스라 할지라도 다 분해시킨다. 묵상의 능력이 여기에 있다. 말씀을 자체화시키는 비결이다. 이를 통해 뼈와 같은 견고한 믿음을 형성시킨다.
소화 흡수가 되어 영양분이 되게 하지 않을 바에야 무엇 때문에 음식을 먹는가? 먹는 재미로 마구 먹는 자들이 있다. 소위 미식가들이다. 그들은 계속 먹어야 하기에 소화가 되기 전에, 화장실에 가서 다시 토해낸다고 한다. 그리고 와서 또 먹는단다. 미친 자들이다. 탐식에 미치고 돈에 미친 자들이다. 영의 세계에도 이와 같은 현상은 비일비재하다.
물리적인 음식은 토해내야 또 먹을 수 있지만, 영적인 말씀을 소화시키지 못하고 계속 먹기만 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래서 고창병이 생겼다. 묵상이 없이 마구 먹어대서 배에 복수가 차는 무서운 병이다. 계속되면 온갖 성인병 증세로 시달릴 것이다. 암은 많이 먹어서 생기는 병이라던가? 그래서 암(癌)이라는 한자는 입이 세 개나 있단다. 영적인 암은 많이 안다는 교만의 도도함과, 타를 정죄하는 증세로 나타난다. 쉽게 치료되지 않기에 치명적이다.
많이 듣고서 소화만 잘 시키면 금상첨화지만, 들은 만큼 실제가 안 된다면, 이것이 쌓여 영적인 병인 교만을 초래하니 죄가 된다. 그러므로 들을 때에 조심할 것은, 자신의 소화능력이다. 들은 만큼 살아내지 못하면 모든 것은 쓰레기에 불과하다. 쓰레기를 치우는 데에는 많은 대가가 요구된다. 실제가 안 된 나머지는 헛것이다. 듣는 것이 모두 구원이 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한다. 행함이 없는 들음은 마침내 내성이 생겨서 냉담자가 되거나, 모두 다 된 것처럼 자기체면에 걸려 살아간다. 일종의 영적 불감증이다.
가끔씩 건강 진단을 받듯이, 이제는 자신을 진단하고 자기를 직시해야한다. 영적 비만에 무거운 몸을 잘 가누지 못하는 상태라면, 당분간 금식도 필요하다. 비만의 가장 좋은 처방은 비싼 약물 복용이 아니라, 절식과 금식이다. 뷔페에 가서 이왕 돈 냈으니 본전 뽑겠다는 심산으로, 온갖 것 때려 넣는 습성은 바보짓이다. 자기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망하게 하는 것이다. 차라리 뷔페를 가지 말아야 한다. 낭비일 뿐이다.
모임에서 많이 들어야 만족을 얻어왔던 습관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기억은 한계가 있다. 자료를 처리할 능력을 넘어서는 입력정보는 속에서 엉켜져서 뒤죽박죽이 된다. 무엇 하나 꺼내 쓰려면 오류가 난다. 출력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내면세계에서 정리가 안 된 이유 때문이다. 이제 입력 정보를 차단하라. 속을 청소하라. PC도 느려지면 포맷을 해야 하듯이, 장시간 중심을 비우는 중대결단을 해야 한다.
시름시름 않던 병에서 치유되려면, 금식과 묵상이 절실하다. 그래야 하나님을 다시 두려워하게 되고, 그 분의 은혜에 감격하게 되며, 죄와 결탁된 행위와 결별하는 힘 있는 회개가 일어난다. 이렇게 영적인 새살이 돋아나야 산다. 이것이 첫 사랑의 회복이다. 주의 명령이 떨어지면 목숨을 다해 순종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 이것이 주님과의 정상적인 관계이다.
습관적 신앙의 행태를 일소하고, 말씀 앞에서 진정성 있는 자세를 취하는 모습으로 탈바꿈해야하는 시기이다. 그렇게 되면 물량중심 모임의 의존 스타일에서 탈피하게 되고, 삶 중심으로 전환하게 될 것이다. 실제가 있는 신앙을 회복하는 길은 오직 묵상이다. 빌라델피아 성도들은 작은 능력(지식적으로 작은)으로도 주의 말을 지키며, 배반치 아니함으로 칭찬을 받았다. 이것이 이기는 비결이다. 오염된 두루마기를 빠는 자만 성안에 들어갈 권세를 얻음을 명심하자.
<계3:8> 볼찌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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