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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와 생명의 증거

[스크랩] 지성소 안의 삶 - 감추인 만나를 먹음 ......

 

 

지성소 안의 삶 - 감추인 만나를 먹음....

 

 

1. 만나 - 그리스도의 예표

만나는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살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합당한 양식을 먹는 일이다.

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살기 위한 기본적인 요구

사람과 사람이 같이 산다 해도 사실은 남남으로 사는 것이고 죽을 때 같이 죽을 수 없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끼리라고 해도 사람은 개별적이다. 하물며 하나님과 사람이 어떻게 같이 살 수 있는가?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기도를 통해서, 어떤 사람들은 영적인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과 함께 하려고 한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경험해 보면 그런 개념들은 대단히 모호한 것들이다. 때문에 왜곡되기 일쑤이고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1) 살기 위해 양식을 먹음

하나님을 모시고 산다는 사람도 있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하나님만 생각하는 삶을 살려고 수도원에 가는 사람도 있다. 조용한 수도원에서 불철주야로 기도만 하고 살면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곳을 떠나 시장 바닥에 나오는 즉시 그런 생각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기독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종교가 그렇다. 자기가 믿는 신앙의 대상을 자기 속에 간직하려고 무진 애를 쓴다. 그러나 세상 일들이 복잡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래서 오로지 그것만 생각하려고 산 속으로 들어가거나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통일시켜서 한 가지만 생각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가만히 앉아서 오로지 한 가지만 생각할 수 있다면 좋겠는데 아무리 해도 안되었다. 나의 소원은 이십사 시간을 예수만 생각하고 싶었고 꿈이라도 예수 꿈만 꾸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더러운 것을 보지 않고 잡된 생각을 하지 않고 살려고 노력하지만 그것은 생각일 뿐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은 아니다. 순간적으로는 될지 모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되지 않는다. 하루에 몇 번씩 정해 놓고 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고 십자가와 고난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합당한 양식을 먹지 않고는 그분과 함께 살 수 없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유일한 방법은 합당한 양식을 먹는 것, 즉 양식이신 그리스도를 먹는 것이다. 그 양식이 내 안에 들어와야 함께 사는 것이지 생각으로 함께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을 동산에 두신 것은 생명나무를 먹게 하신 것이다. “너는 24시간 나만 계속 생각하라.”고 하시지 않고 생명나무를 두고 그것을 먹게 하셨다. 생명나무를 먹어야 생명나무로 나타나신 그분이 우리 안에 사신다.

 

살기 위해서는 양식을 먹어야 한다. 육신이 살려면 육신의 양식을 먹어야 하고 하나님 안에 살려면 하나님의 양식을 먹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양식을 공급 받아야 하는데 그 양식은 영원한 인격이신 그리스도이다. 영원한 인격으로 살려면 영원한 인격을 계속 공급받아야 한다. 아침을 먹었지만 점심을 먹어야 되는 것처럼 그 양식은 오늘도 먹어야 하고 내일도 먹어야 한다. 아침을 든든히 먹어도 시간이 지나면 또 배가 고플 것이다. 생명이 그렇게 원하기 때문에 먹어야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계속 공급받아야 한다. 공급받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그리스도의 삶을 살 수 없고 그분을 공급받지 않고는 생존이 불가능하다. 그리스도의 생존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 안에는 여기저기 전선이 깔려 있다. 그 전선이 살아 있는 전선이 되려면 전기가 계속 공급되어야 한다. 전기가 끊어지면 전선은 철사에 불과하다. 전기가 계속 공급되어야 전선이 될 수 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의 영원한 인격이 양식으로 계속 공급될 때 그리스도인이지 양식이 끊어지면 흙덩어리에 불과하다. 모든 생명체는 영양분을 공급받아서 생존하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는 것이다.

2) 자라기 위해 양식을 먹음
자라기 위해서 먹어야 한다. 사람을 지으셨으면 그만이지 왜 동산에 두시고 생명나무를 주셨는가? 생명체는 낳았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라야 한다. 기계는 자라지 않는다. 만들어진 그대로다. 그런데 생명체는 자라야 한다. 자라야만 함께 살 수 있다. ‘함께 산다.’는 것을 성경은 신부로 묘사하였다. ‘아들’은 출생을 의미하는 말로 ‘한 생명’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서 난 것은 예수와 한 생명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자라지 않으면 그분과 함께 살 수 없다. 여자가 자라지 않으면 신부가 될 수 없다.

우리가 그 생명으로 난 것은 신부가 되기 위함이다. 성경에는 마지막에 신부이다. 처음은 창조이고 다음은 아들이며 마지막은 신부이다. 신부라야 함께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결혼을 하는 것은 자랐기 때문이다. 자라지 않으면 결혼을 할 수 없다. 옛날에는 어렸을 때 정혼을 해 놓고 자란 다음에 혼례를 치렀다. 동산에 두신 이유는 자라게 하시려는 것이다. 자라서 성숙한 만큼 우리는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다. 자라기 위해서는 이 양식을 먹어야 한다. 먹는 것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구속은 대신해 줄 수 있지만 자라는 것은 대신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고 낳으셨지만 그분이 우리 대신 먹어 주실 수는 없다. 먹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서 자랄 수는 없다.

 

엄마는 아기를 낳을 수는 있지만 아기 대신 먹어 줄 수는 없다. 요즘 아이들은 밥을 잘 먹으려고 하지 않는데 그런 아이를 보면서 엄마는 얼마나 안타깝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안타까워도 엄마가 대신 먹어 줄 수는 없다. ‘하나님이 자라게 해 주시겠지. 가만히 있으면 자라겠지.’라고 생각하고 말씀을 듣지 않으면 절대로 자랄 수 없다. 말씀을 먹은 것만큼 자란다. 먹고 자라서 신부가 되면 둘이 연합하여 함께 살 수 있다. 그러므로 먹는 문제는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문제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먹는 것으로 표현한 이유는 먹는 것이 가장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먹는 데는 관심이 없고 일에만 관심이 있다. 교회들을 보면 일은 굉장히 많은데 먹는 양식이 없다. 그러나 아무리 일을 해 봤자 먹는 수준 이상의 일은 할 수 없다. 하나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안에서 영과 생명의 말씀의 양식을 먹어야 한다.....



출처 : 베다니사랑과 복음- 평신도 교회
글쓴이 : 본향그리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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