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기초는 사랑
아이들이 부모에게 매여 있을 때는 안식이 있지만 부모에서 끊어졌을 때는 안식이 없게 된다. 모든 생명도 뿌리에 연결돼 있을 때는 안식이 있지만 뿌리에서 끊어지게 되면 안식이 없게 된다. 우리는 일이 잘되면 평안하고 일이 안되면 평안하지 않을줄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사람은 불안하다. 은혜가 오면 사람은 평안해지게 된다. 은혜를 깨달을 때 평강이 오게 된다.
세상에서는 아무 문제도 없고 만사 형통하면 평안하다고 한다. 인생에 있어서 참 평안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도달될 때 참 평안을 갖게 된다. 은혜가 도달되지 않으면 인생은 아무리 잘돼도 불안하고, 아무리 번성해도 불안하다. 아담은 범죄하고 난 후에 아무런 일도 없었지만 스스로가 두려워서 숨었던 것이다. 본 궤도를 이탈했고 아버지의 사랑의 줄기에서 끊어졌기 때문에 불안한 존재가 된 것이다.
자녀들은 부모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부모가 자기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것을 알게 되면 마음에 평안이 오게 된다. 그러나 부모가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고 있다는 것을 모를 때는 자녀에게 평강이 없다. 무슨 사건이 생겨서가 아니고 사건이 없어도 사람은 근원이 없기 때문에 평안이 없게 된다. 평안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은혜라는 방식으로 도달될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 평안은 우리에게 다시 사랑을 일으키게 만든다. 내가 불안하고서는 사랑이 없다. 내게 안식이 없으면 사랑이 나오지 않는다. 사람은 자기가 괴롭고 불안하고 고통스러우면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안에 참된 평안이 와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뿌리가 사랑에서 왔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은혜라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도달됐을 때 우리에게는 평강이 오게 되고 그 결과로 우리 안에서 사랑이 다시 나가게 된다. 콩을 심어서 콩이 열리는 이치와 똑같다. 사랑은 내가 하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그냥 나오는 것도 아니다. 우리 안에 사랑이 심어져서 사랑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은 사랑을 낳고 증오는 증오를 낳는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한 사람은 영원한 사랑을 가질 수 없다. 사람은 자기가 받은 것 만큼밖에는 표현할 수 없다. 에로스를 받았으면 에로스를 표현하고, 아가페를 받았으면 아가페를 표현하는 것이다. 자기가 받은 대로 표현하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이 은혜라는 방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돼 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게 된다.
육신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육신의 사랑을 표현한다. 부모에게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은 꼭 자기 자녀에게 사랑을 표현하게 된다.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은 남에게 사랑을 표현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랑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게 된다. 원래 아가페는 우리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것인데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가페로 사랑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평강이 왔고, 평강이 왔기 때문에 우리는 또 그 사랑을 표현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을 때 그가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왜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줄 수 있는가? 그도 우리와 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줄 수 있는가? 그것은 그분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서 은혜를 통해서 평강 안에 왔기 때문에 우리에게 아가페를 줄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랑을 받았는가 하는 것이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랑을 줄 수 있는가를 결정하게 된다.
집안에서 부모가 아이들을 때리면 그 아이들은 반드시 밖에 나가서 다른 아이들을 때리게 돼 있다. 그런데 부모에게 맞아 보지 않은 아이들은 다른 아이를 때릴 줄 모른다. 누구를 때리는 것도 누구에게 맞아 봤기 때문에 때리는 것이다. 맞아 보지 않은 사람은 때린다는 개념이 없다. 의심가운데 산 사람이 남을 의심하는 것이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부모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다.
사랑을 받은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게 된다. 자기가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은 본능적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많이 맞은 사람은 본능적으로 남을 때리고 싶고, 많이 사랑을 받은 사람은 남을 사랑하고 싶은 것이 생명의 이치이다.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엡 6: 23-24).
바울은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하면서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 사랑이 오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는 성령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아버지와 아들만을 언급했는데, 사랑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있는 이것이 사랑이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이것이 사랑이다. 이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그런 사랑과는 다른 것이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이것이 사랑이다. 아버지가 내 안에 오셨다는 것은 사랑이 통채로 나에게 부어진 것이다. 아버지가 사랑의 원천이며 그의 아들이 곧 그의 사랑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내 안에 오신 그분이 사랑이다. 내 안에 오신 사랑이 나로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내 안에 오신 사랑이 나로 형제를 진정 사랑하게 하는 원천이 된다. 사단의 영이 내 안에 있다면 원망과 시비와 너절함이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
우리가 아버지 안에 있다면, 아버지가 예수 안에 있고 예수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처럼 우리가 또 예수 안에 있으면 세상이 우리가 그의 제자인줄 알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고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요한 일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서로 사랑하자! 그러면 세상이 우리를 보고 예수의 제자인줄 알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에게 그 사랑으로 왔기 때문에 세상은 우리를 보고 '저들이 예수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구나!' 라고 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라고 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있고 내가 아버지안에 있다는 것을 관념적으로 가지고 있다면 다른 사람이 생각할 때 누가 "저 사람은 예수님께서 보냈구나! 아버지께서 보냈구나!"하고 알겠는가?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 말미암아서 그렇게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하신 것이다. 우리가 그 안에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보일 리도 없고 하나님이 내 안에 있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보일 리도 없는 것이다. 보이는 것은 사랑이다. 우리가 서로 안에 있다는 것은 결국 사랑을 통해서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라고 하신 것은 '우리 안에 있게 한 결과로 인해서 세상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는 뜻이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과 나는 하나다!'라고 말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것을 볼 수 없다. 어떤 아버지가 좋은 아버지인줄 알겠는가? 그 아들을 통해서 그 아버지가 드러나야만 그 아버지가 참 좋은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서' 라고 할 때 '하나가 되어서' 이것이 곧 사랑이다. 이 사랑을 보고 사람들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의 신성한 생명의 연합체라는 것을 다시 보게 된다. 교회는 두 생명이 합한 것이다. 연합한 하나의 다른 생명이다. 연합된 생명체인 교회인 것이다. 교회는 연합된 생명체이다. 땅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가 되는 것도 아니고, 어떤 교리가 있기 때문에 교회가 되는 것도 아니다. 신성한 생명과 사람의 생명이 연합해서 하나의 실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 교회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바로 이런 생명의 연합체를 갖는 것이다. 한 생명의 연합체를 갖는 것이다. 창조하고 구원하시고 우리를 거룩케 하고 영화롭게 하시는 모든 일들은 한 연합체를 목표로 하신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를 천당에 보내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구원의 확신이 있는가? 없는가?"하는 말을 하고 있다.
복음주의적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일수록 구원의 확신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얘기를 자꾸 하는 것을 보게 된다. 구원은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인가? 구원은 우리가 천당에 가기 위한 차표를 확보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목표는 한 생명체를 갖게 하기 위한 것이다. 연합된 생명체를 갖기 위한 것이다. 만일 그들의 말대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더라도 생명의 연합체가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철근을 아무리 많이 만들어 놓았다고 해도 건축을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벽돌이라도 건축에 들어가지 않는 벽돌은 결국 버려지고 만다. 완벽한 벽돌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건축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쓰레기처럼 돼 버릴 것이다. 그러나 건축에 포함된 벽돌은 비록 그것이 형편없는 벽돌이라 하더라도, 건축 속에 들어가게 된다면 건축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표는 연합된 생명체인 교회를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합된 생명체인 교회는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으로 표현된다. 연합이 되었으면 건물은 집으로 표현될 것이다. 교회는 그런 집이 아니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이 무엇으로 표현될 것인가?
연합된 생명체를 보기 위해서는 무엇을 가지고 보겠는가? 연합된 생명체가 드러나는 것은 사람들 속에서 서로 사랑이 오고 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고 "이것이 연합된 생명체로구나! "하고 아는 것이다. 결코 큰 기적이 일어나서 사람들이 열광하고 박수를 치는 것으로는 연합된 생명체가 될 수 없다. 연합된 생명체! 이것이 하나님의 모든 경륜의 목표이다. 창조의 목적이고, 구원의 목적이고, 우리를 거룩케 하신 목적이다.
우리를 구속하신 목적이고, 영화롭게 하신 목적이다. 때때로 우리가 세상을 승리하게 하는 목적이기도 하다. 사실은 승리까지라도 연합체인 생명을 위해서 승리하게 하시는 것이다. 결코 승리 자체에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이 연합체가 없다면 승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 승리는 연합체인 생명 안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당신의 교회를 갖는 것이다. 연합된 생명체인 교회를 갖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듯이 저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저희가 아버지께로부터 온 줄을 알게하여 주옵소서!" 태초의 하나님의 목적인 교회! 교회는 하나님의 태초의 목적이다. 우리가 합당한 교회생활 안에 있으려면 우리가 하나님의 맨 처음의 목적을 꼭 알지 않으면 안된다.
기독교인들이 왜 엉뚱한 길로 가고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태초의 목적을 모르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천지가 창조되었는지, 무엇 때문에 사람이 창조되었는지, 왜 구원을 하시는 지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이 창세전에 에비되었으나 숨겨진 비밀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모셔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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