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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와 생명의 증거

[스크랩] 교회건축 재료의 다루심....

우리는 하나님의 건축에 부르심을 받아 건축의 재료로 또는 건축자재로 조성되는 과정에 있다. 건축과 생활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건축은 곧 생활이고 생활은 곧 건축이다. 우리는 집을 지어놓고 그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 안에서, 실재 안에서는 집을 짓는 것과 생활하는 것이 둘이 아니고 하나다. 마찬가지로 재료가 되는 것과 건축이 되는 것도 둘이 아니고 하나이다.

 

나무에 금을 입히는 것도 건축이고, 금이 입혀진 판자로 성막을 짓는 것도 건축이다.  우리가 온전한 교회로 조성된다면 그것은 곧 온전한 삶을 갖는 것이며 온전한 삶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온전한 교회로 건축되는 것이다. 건축과 생활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다. 우리는 편의상 이것을 둘로 나누어서 인식할 뿐이다. 이번에는 건축과 제사의 재료를 어떻게 다루어서 만드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근원으로부터 잘림

 

나무는 천연적인 상태에서는 건축에 쓰일 수 없다. 관상용이 있기는 하지만 특별한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이것을 다루어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소나무가  많이 있어서 경관이 아름답게 보이기는 하지만 건축에 쓰려면 이것을 잘라야 한다. 나무가 잘리는 것은 자신의 근본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나무에게는 그것이 죽음이고 끝이다. 뿌리로부터 진액을 받아 자라는 나무를 어느 날 목수가 자르게 되면 그날로부터 나무와 뿌리는 관계가 끊어진다.

 

지금까지 공급해 주었던 모든 근원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쓰이는 첫 번째 단계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너는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곳으로 가라(창 12:1)"고 말씀하셨다. 왜 이런 말씀이 아브라함에게 들려왔던가? 아담 이후로 오랜 역사를 지나오는 동안 인류는 이것을 해도 구원이 안되고 저것을 해도 구원이 안되었다. 하나님이 방주를 통해 노아를 구원했어도 다시 타락하여 바벨탑을 쌓을 뿐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모든 근원으로부터 한 사람을 잘라서 .당신의 한 목적, 한 건축을 위해서 사용하시려고 작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나무가 뿌리로부터 잘린다는 것은 아담으로부터 잘리는 것을 말한다. 더 실재적으로 말하면 선악과로부터, 네피림으로부터 바벨탑으로부터 잘리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옛 생명은 하나님께 무용하다. 우리의 옛 생명이 잘리지 않으면 계속 옛 것이 나온다. 돌감나무는 어떤 방법을 써도 돌감이 열리는 것이다. 돌감이 열리지 않을 방법이 없다. 돌감나무에 열심히 비료와 퇴비를 줄수록  더욱 더 많은 돌감이 열리게 된다.

 

옛 생명의 문제는 그의 근원에 있다. 돌감나무에서 돌감이 열리는데 이것은 비료가 부족해서 그렇구나라고 생각하고 비료를 더 주어보라. 그러면 더 많은 돌감이 열리지 않겠는가. 한 가지에서 돌감이 열리는 것을 보고 그 가지를 자르면 또 다른 가지에서 돌감이 나오게 된다. 가지 하나를 자르면 오히려 둘씩 나온다. 잘라도 안되고 다듬어도 안되며 비료를 주어도 않된다. 무슨 수를 쓸지라도 돌감나무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바꾸는 길은 오직 근원으로부터 잘라내어 다른 것에 접붙이는 것 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결론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그렇게 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길이 있지 않을까 하여 좀 더 많은 비료를 주려 한다. 더 좋은 종교적인 방법을 연구하며 더 열심히  기도하고 더 열심이 전도하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더 열심이 기도한다고 해서 돌감나무에서 단감이 열리겠는가? 오히려 돌감이 더 많이 열리게 될 것이다. 기도한다고 돌감나무에 단감을 열게 해주는 하나님은 없다.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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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돌감나무인줄 모르고 열심히 하면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만 생각한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돌감나무의 근원을 자르고 기도 해야 한다. 돌감나무를 그대로 두고 기도하면 돌감을 더욱 많이 열리게 할 뿐이다. 옛 근원으로부터 단절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누리는 교회생활은 어느 때는 좋고 어느 때는 충만하지만 어느 때는 즉시 나쁜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하나님을 안다고 말했다가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었는데 오늘 하나님을 도저히 찬양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자기의 옛 근원이 그냥 남아 있어 돌감이 계속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돌감나무를 자르지 않고는 돌감이 열리지 않을 방법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막을 건축하는 나무는 먼저 자기 근원으로부터 잘려진다. 우리는 이 문제가 가장 중요하고도 가장 절실한 문제임을 인식해야 한다. 내가 무엇을 하면 된다는 생각만 가질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고있는 내가 누구냐에 따라서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살아있는 나무로는 결코 건축할 수 없다. 땅에서 잘려야 하며 세상에서 온전히 끝나야 하는 것이다. 세상에 어떤 미련이라도 남겨 둔다면 잘린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온전한 죽음이 없이 부활에 이를 수 없다. 온전히 죽지 않았는데 어떻게 다른 것으로 태어날 수 있겠는가.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없다. 나무는 반드시 잘려야만 다른 목적에 사용될 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옛 근원을 붙잡고 있어서는 다른 목적에 사용될 수 없다. 근원으로부터 잘릴 때 다른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첫 출발이 가능하다. 유월절 양을 경험해야 하지만 또한 애굽에서 나와야 한다.

 

출처 : 베다니사랑과 복음- 평신도 교회
글쓴이 : 본향그리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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