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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와 생명의 증거

[스크랩] 만나.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의 예표....

 

 

 

만나.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의 예표....

 

 



만나는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 ‘그리스도’는 타락한 이후에 어떤 인간으로도 완전한 묘사가 불가능하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에 관한 많은 묘사가 있다. 생명나무, 어린양, 왕, 제사장, 제사장의 의복, 제사장의 봉사, 성막과 그 기구들, 신랑, 선생, 친구, 떡, 포도주…, 등 많은 묘사가 있다. 그러나 어디서도 누구와 같다고 하지는 않았다. 아브라함 같다고도 할 수 없고 이삭이나 야곱 같다고도 할 수 없다. 누구라고 할 수 없는 분이다. 다윗과 같은 분이라고 할 수도 없고 솔로몬과 같은 분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래서 모세보다, 다윗보다, 솔로몬보다, 성막보다 크시다고 했을 뿐이지 어느 누구와 같은 분이라고 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왜 이렇게 여러 가지 이름으로 묘사되었는가? 어느 한 가지로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많은 묘사를 듣는 동안에 우리에게 ‘그분은 이런 분이구나.’라는 개념이 생겨서 먹게 되는 것이다. ‘생명나무, 어린양, …’을 외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를 깊이 듣고 어린양을 깊이 듣는 동안에 그분에 대한 개념이 생기게 된다.

우리는 그분을 그렇게 밖에 알 수 없다. 죽고 사신 분이기 때문이다. 죽고 산 사람이 있으면 그와 같다고 하면 되는데 죽고 산 것이 없기 때문에 묘사가 불가능한 것이다. 성경은 그분을 가리켜 ‘산 자’라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 있는 것과 다르고 죽었다가 며칠만에 깨어난 것과도 다르다. 죽고 산 자니까 아담과는 전혀 다른 분이다. 아담은 죽었을 뿐 다시 살지 못한다.

우리의 육신 안에는 다시 사는 것이 없다. 부활에 대해서 사람들은 우리 육신이 죽었다가 다시 그 육신으로 부활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 속에는 죽었다가 산 것이 없다. 죽으면 썩을 뿐이지 절대로 살지 못한다. 내가 죽으면 예수님이 오실 때 이 몸으로 다시 살 수 있겠는가? 절대로 불가능하다. 육신은 썩어서 없어져 버린다. 할아버님 묘를 몇 십 년 만에 이장을 했는데 뼈만 남아 있었다. 그 뼈는 아무리 봐도 할아버님 같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다른 뼈나 그 뼈나 같았다. 유전자 검사를 하면 나오겠지만 그 뼈를 보고 할아버님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 묘에 매장하였다가 다시 팠으니까 할아버지 뼈인 줄 아는 것이지 다른 데서 보고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육신은 썩어 버린다.절대로 부활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고 사신 분이다. 그래서 그분을 묘사할 수 없는 것이다. 아담과 같지 않은 분이기 때문이다. 로마서 14장 9절에는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하였다. 전혀 다른 세계, 아담이나 아담 안에 있는 것이 아닌 새로운 것이다. 하루살이가 파리를 모르듯이 아담은 그리스도를 모를 수밖에 없다. 전혀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사신 분이기 때문에 아담을 알지만 아담은 죽은 일이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 수 없다. 

사람들은 우리가 이런 몸으로 부활한다고 하면 ‘무덤에 있다가 무덤이 터지면서 나오겠구나.’라고 생각한다. 오늘 죽었다가 내일이나 모레 일어난다면 모르겠지만 백 년쯤 지나면 뼈만 남아서 어떻게 일어나겠는가? .

그러나 죽고 사는 것은 사람에게 없는 개념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이것이 제자들에게 가장 의문이었다. 그들이 알고 있던 부활 같으면 염려하지 않았을 텐데 그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며 수근거렸던 것이다. 누가복음 18장 34절에는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제자들까지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부활 사상이 없었는가? 그렇지 않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하였다. 그들은 이미 오늘날 사람들이 믿는 부활과 같은 부활을 믿고 있었다. 그런데 제자들은 왜 몰랐던 것인가? 그것이 아니니까 몰랐던 것이다.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답답했다. 그리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달아나 버렸다. 사흘만 기다리면 다시 일어나실 텐데 왜 달아났겠는가?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신다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다. 그런데 왜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달아났는가? 그들은 그 말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이라고 묘사할 수 없는 분이다. 만나를 무엇이라고 할 수 없었던 것처럼 그리스도는 무엇이라고 단정해서 규정할 수 없는 분이다.

어느 생명이든지 생명은 다 그렇다. 금붕어를 놓고 그 생명을 분석해서 칼슘과 단백질과 지방질, 그리고 색소 등의 함량이 얼마인지 안다고 금붕어를 아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분석하면 금붕어는 죽어 버린다. 그리고 그것들을 재합성한다고 금붕어가 되는 것도 아니다. 물질은 되지만 생명은 되지 않는다. 생명은 화학 구조식으로 분석할 수 없다. 인삼의 성분을 분석할 수는 있어도 그 성분들을 조합해서 인삼을 만들 수는 없다. 영원한 생명이신 그분은 우리가 무엇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가 그분을 믿고 받아 들이고 영과 생명의 말씀의 양식을 먹으면 우리 안에서 그분이 재생산된다.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재생산되고 자라서 부활생명으로 온전케 되는 것이다.

출처 : 베다니사랑과 복음- 평신도 교회
글쓴이 : 본향그리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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