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화 이야기 /겸향 이병한
어떤 그림이든지 그림 속엔
화가의 성품이 반영되어 있는 것처럼
창조물 속엔 창조주의 거룩한 성품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특히 들꽃들은 주님이 직접
꽃들의 옷을 입히신다는 표현을 하심으로
우리로 그 의미를 더 주목하게 하시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자신을 위해서
수고도 길쌈도 하지 않으나 너희 천부께서 입히시지 않느냐
특별히 주님은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 던져지는 들풀도 이렇게 입히시는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라고 말씀하셨지요.
사실 우리가 생각 할 때, 들에 핀 백합화 하고
솔로몬의 영광과 비교 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된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솔로몬의 영광은 전무후무한 영광이지만
백합화는 며칠 동안만 피었다 지는 들풀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이 둘을 비교하면서
백합화가 더 영광스런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즉 솔로몬은 자기 스스로 입은 영광이지만
들꽃은 천부께서 입힌 영광이기에
솔로몬의 영광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인위적인 영광과 천부께서 주시는 영광과 비교 한다면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지라도
하늘의 영광은 인위적인 것과는 비교가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모든 영광을 인위적으로 성형하고 조작해서
만들어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이 내린 영광을 실종하게 된 이유인 것이지요.
하늘이 내린 영광 그대로 사신분이 있다면 그분은 예수님이시지요.
예수님은 인위적인 영광은 무엇이든지 다 거부 하시고
오직 자신의 몸을 아버지 손에만 부탁 하셨으니까
물 한 모금 떡 한 덩이라도 아버지께서 허락 하신 것만을 받으셨으니
예수님의 영광을 인위적으로 더 보충할일도 전혀 없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만 이야기해도 그 영광은
지극히 높은 아버지의 보좌 우편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들에 핀 백합화는
지금의 백합화하고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팔레스틴 땅에 핀 백합화는 붉은색 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흰 백합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린 굳이 흰 백합을 아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그 영광은 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풍랑으로 인해 자신의 삶이 추락하고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비판에 직면한다 해도
그것조차도 겸손의 재료로 받아서 섬김의 삶으로서
하늘이 영광스럽게 할 때까지 묵묵히 기다린다는 것은
그래서 더욱 필요한 일이지요
조급증에 걸린 우린 한 순간도
억울한 것을 못 참고 분노를 분출하고
안 되면 사건을 조작이라도 하려고 덤벼들기도 합니다.
주님의 뜻에 맡긴 채 언제한번 묵묵히 견디며 순종하였던가요?
교회나 성도나 인위적인 것을 제거 하는 것이
하늘의 영광을 회복하는 길이요
들에 핀 백합보다는 더 났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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