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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와 생명의 증거

[스크랩] 영과 혼의 분별....

 

영과 혼의 분별

 

심리학자들은 사람을 분석하여 형이상학적인 부분과 형이하학적인 부분의 두 부분으로 나눈다. 형이하학적인 부분은 육체를 의미하며, 형이상학적인 부분은 정신을 의미하는데 이는 성경에서 말한 혼이다. 그들은 사람의 몸 안에 정신, 즉 혼만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 안에 혼외에 영이 있음을 말해 준다.

데살로니가 전서 523절은 혼만을 말하지 않고 영과 혼을 말한다. 영과 혼은 두 가지의 서로 다른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412절은 혼과 영을 나누는 것에 대해 말한다.

생명 안에서 참된 영적 성장을 얻고자 한다면 영과 혼이 서로 다른 두 가지 것임을 알아야 하며, 영이 무엇이고 혼은 무엇이며, 무엇이 영적이고 무엇이 혼적인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영과 혼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어야 혼을 부인하고 혼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 앞에 영으로 말미암아 살 수 있다.

 

고린도 전서 214절과 15절은 두 부류의 사람에 대해 말한다. 한 부류는 혼적인 사람(육에 속한 사람에 대한 원문은 혼적인 사람이다)이고, 다른 한 부류는 영적인 사람이다.

이것은 사람이 혼과 영, 다른 이 두 가지 중 하나로 말미암아 살고 또 그것에 속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람은 혼으로 말미암아 살고 혼에 속하여 혼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영으로 말미암아 살고 영에 속하여 영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 것들을 분별하고 받아들일 수 있지만 혼적인 사람은 그러한 것들을 받아들일 수 없고 알 수조차 없다. 이것은 혼과 영이 분명히 대비됨을 분명히 보여 준다. 영은 하나님과 통할 수 있고 하나님의 영에 속한 것들을 분별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영에 속한 것들은 혼과는 조화되지 않으며 적절하지 않다. 영은 하나님의 것들을 좋아하고 수용하기를 기뻐하지만 혼은 그렇지 않다. 혼은 그러한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어리석게 여긴다.

성경 안에서 육신이 영에 반대됨을 보여주는 로마서 8장뿐 아니라 혼이 영과 반대됨을 보여주는 고린도 전서 2장도 있다.

육신으로 말미암아 사는 사람은 육신에 속하고 영에 속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혼으로 말미암아 사는 사람은 혼에 속하고 영에 속하지 않는다. 로마서 8장은 육신에 관해 말하면서 죄와의 관계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죄짓는 사람은 다 육신에 속한다. 그러나 혼은 반드시 직접적으로 죄와 관계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죄를 짓는 않고 육신에 속하지 않는(사람이 볼 때) 사람도 여전히 혼적이고 영적이지 않을 수 있다(엄격히 말해서 사람의 혼은 육신 아래 타락하였으므로 사람은 혼적일 때 또한 육신에 속한다. 그러나 우리가 혼 자체를 말할 때 혼의 존재와 육신의 존재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죄에서 해방되어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육신에 속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반드시 영적이고 혼적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또 그것은 반드시 우리가 하나님의 영에 속한 것들을 이해하거나 하나님에 속한 것들의 뜻을 파악하고 좋아하고 받아들일 수 있음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종종 죄에서 해방되고 육신 안에서 날뛰는 것만 멈춘다면 우리가 영적일 수 있고 하나님과 통할 수 있고 하나님의 영에 속한 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비록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고 더 이상 육신 안에서 날뛰는 것 같지 않다 할지라도 여전히 혼으로 말미암아 살고 영으로 살지 않을 수 있다.

 

주님의 구원은 우리를 죄와 육신에서 구해내실 뿐 아니라 혼에서도 구해 내신다. 주님의 구원의 목적은 우리가 죄나 육신 안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우리가 혼 아닌 영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분의 구원은 우리를 도덕적인 사람이 되도록 도덕성의 정도에서 구원하실 뿐 아니라 , 더 나아가 우리를 영적인 사람이 되도록 영성의 정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훌륭한 도덕성을 지닌 사람이 반드시 영적인 사람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가 혼적인 사람으로서 혼으로 말미암아 사는 사람일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형제나 자매는 매우 도덕적이고 선함에도 불구하고 혼으로 말미암아 살고 있고 혼적이기 때문에 하나님 속한 영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깨달음이 없고 그러한 것들을 갈망하거나 소중이 여기지도 않으며 심지어 그러한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고린도 전서 214절은 혼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 것들에 대한 혼의 상태에 관하여 분명하고도 충분히 말해 준다.

혼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 것들을받지 않고” “깨닫지도 못하다혼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 것들을 원하지 않을 뿐 더러 그러한 것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

혼이 그러한 것들을 받아들이고 싶어 할지라도 그것들을 깨닫거나 이해할 수 없으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혼의 본성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 것들과 조화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혼은 하나님에 속한 것들을 원하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더욱이 혼에는 하나님에 속한 것들을 깨닫는 능력이 전혀 없다. 그러므로 혼으로 말미암아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 것들에 대해서 아무런 느낌도, 관심도, 소망도 없을 뿐더러 그러한 것들을 찾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으며 이해조차도 못한다.

 

그런 이유로 하나님은 우리를 혼으로 말미암아 살지 않도록 혼에서 구출하셔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고 이해하고 수용하도록 하실 수 있다.

우리는 영적인 것들에 있어서의 혼의 무력함에 관하여 분명해져야 하며 그것을 중요한 문제로 여겨야 한다. 혼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 것들을 받지 않으며 깨닫지도 못한다.

혼으로 말미암아 사는 어떤 형제나 자매는 매우 선하고 잘 처신하며 미덕이 있지만 영적인 것들은 알지 못하며 영적인 것들을 갈망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런 많은 형제자매들을 만나왔다.

그들은 그들의 행위에 매우 조심하므로 그들의 행위에 흠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벽처럼 막혀있고 그것들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의 도덕성이나 선악의 옳고 그름의 표준대로 그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며, 모든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에 속한 의식과 통찰력이 부족하다.

 

그들은 그들의 생각 안에서 영리하고 그들의 지식 안에서 강할지 모르지만 그들의 영 안에 빛 비춤이 없으며 영의 느낌이 무감각하다. 그들을 선한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나 영에 속한 그리스도이라 부를 수 없다.

행위에 관한한 그들은 정말 선하다. 그들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알고,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안다. 그들은 영리하고 빈틈이 없으며 부지런하고 철저하다. 그러한 그들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 것들을 접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른다. 마치 그들은 나무나 돌이 된 것처럼 아무 느낌도 이해하는 능력도 없다.

게다기 종종 영적인 것들을 향한 그들의 마음은 냉랭하다. 그들을 이해하는 데에서도 느릴 뿐 아니라 추구하는 데에서도 또한 게으르다.

그러므로 선한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영적인 그리스도인들인 것은 아니다. 영적인 그리스도들은 행위에 있어서 그저 단순히 선하지는 않다. 그들은 영의 느낌을 가지며, 영적인 것들을 이해하며, 내적으로 하나님의 방법을 알며, 영적인 것들에 있어서 노련함을 가지며, 영 안에서 산다.

 

선함과 영적인 것은 매우 다르다. 많은 형제자매들이 선하지만 영적이지 않다. 그들은 선하지만 영 안에서 살지 않는다. 그들에게서 선함은 대하지만 영은 대하지 못한다. 그들에게서 사람의 미덕은 보지만 하나님의 향기는 맡지 못한다.

어떤 면에서 말하자면 그들이 육신 안에 있는 것 같지만 그들은 확실히 혼 안에 있다. 비록 그들은 육신을 방종하게 하지는 않지만 영 안에 살지도 않는다. 그들은 죄 짓는 일들을 승인하지는 않지만 영적인 것들을 갈망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육신을 좇아 죄를 짓지는 않지만 자아, 즉 혼으로 말미암아 산다. 혼이 그들의 생명의 근원이며 생활의 수단이가도 하다. 그들은 혼 안에서 혼으로 말미암아 살기 때문에 혼적인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적인 것들을 원하지 않으며 그러한 것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혼은 우리의 개인적인 인격, 우리의 자아이다.

그러므로 혼은 우리 자신이다. 분석적으로 말하자면 혼 안에 포함된 것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세부분이다. 생각은 사람의 사고하는 기관이다. 이것은 우리가 두뇌라고 말하는 것이다. 생리학상으로 두뇌이고 심리학으로는 생각이다.

그것은 혼의 중요한 부분이다. 사람이 사고하고 묵상하고 고려하고 기억하는 것은 모두 혼 안에 있는 생각의 기능이다. 타락후의 사람, 특히 오늘날의 사람은 대부분 생각 안에서 살고 생각의 사고의 지시를 받는다.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한다. 사람의 행동은 항상 사람의 사고에 묶인다. 사고 안에서 살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고려하고 있는 것이 사람이든 어떤 사물이든 간에 우리가 사람의 생각을 얻으려면 사람의 사고에서부터 시작하야 한다. 오늘날 대단히 많은 이론들과 학교들과 교육체계가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사람의 생각을 얻기 위해 사람의 사고를 다루는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

만일 당신이 그의 사고로 인해 어떤 사람의 생각을 얻을 수 있다면 당신은 그를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생각, 즉 두뇌 안에 살고 생각의 사고의 지시를 받기 때문이다.

 

혼 안에 있는 감정은 사람이 사랑하고 화내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기관이다.

사람이 사랑하고 미워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흥분하거나 침체하는 것은 다 사람의 혼 안에 있는 감정의 기능이다.

많은 사람들이 감정에 약하다. 그들은 감정이 풍부하고 매우 쉽게 흥분한다. 그들은 종종 문제들을 그들의 감정으로 처리한다. 그러한 사람을 사고로 설득하면 통과하기가 어렵지만 그들의 감정은 매우 쉽게 움직여질 수 있다. 그들은 당신의 생각으로는 설득되지 않지만 감정으로는 쉽게 움직여진다.

혼 안에 있는 의지는 사람이 결정을 내리는 기관이다.

사람이 결정하고 결심하고 판단하고 선택하고 받아들이고 거절하는 것은 모두 사람의 혼 안에 있는 의지의 기능이다. 어떤 사람은 생각 안에 있고, 어떤 사람은 감정 안에 있고, 어떤 사람은 의지 안에 있다.

 

생각이나 감정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생각이나 감정으로 살듯이 의지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의지로 산다. 생각이나 감정이 그 사람들의 가장 강한 부분이듯이 의지도 그러하다.

의지 안에 있는 사람은 확실히 그의 결정에 있어서 강하다.

일단 그가 어떤 행동의 과정에 관해 결심했다면, 결코 그를 변경시킬 수 없다. 단신이 그를 설득하더라도 그는 이유를 주의하지 않는다. 당신이 감정으로 그에게 호소하더라도 그는 결코 감정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는 그의 의지로 말미암아 행동하는, 의지 안에 있는 사람이다.

 

혼 안에 있는 것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세 부분이다. 이 세 부분은 모든 사람 안에서 저절로 표현된다.

모든 사람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갖고 있다.

그러나 더러는 생각 안에 더 많이 있고, 더러는 감정이 더 풍부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의지에 있어서 더 강하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이 아주 총명하다. 감정으로 그들을 움직이려고 아무리 애써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을 얻으려면 당신은 이성을 사용해야 한다.

그들은 생각, 혹은 두뇌 안에 살고 있는 지적인 사람들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특히 감정에 있어서 풍부하다. 그들은 마치 두뇌도 없고 생각도 없고 감정만을 소유한 것 같다. 그러한 사람들은 종종 그들의 감정으로 인해 일을 그르친다. 그들을 설득해 보면 그들은 주의하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않으며 그들의 마음이 감동되지도 않는다.

 

만일 당신이 그들을 감정으로 다룬다면 그들의 내부를 만지기는 매우 쉽다. 수천수만의 이유들도 그들에게는 한두 방울의 눈물보다 효력이 없다.

때때로 당신이 아무리 그들을 설득해도 그들을 납득시키지 못하지만 당신이 단지 약간의 눈물을 흘리기만 하면 그들을 설득할 수 있다. 그들은 감정을 주의할 뿐 이성은 주의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들이 지식 안에 있지 않고 감정 안에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의 의지는 특별히 강하다. 그들은 모두 것에 대해 어떤 제안이나 의견을 가진다. 그들은 일단 결정을 하면 매우 확고해서 쉽게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대개 아주 견고해고 완고하며 감정이나 이성은 주의하지 않는다.

 

모든 것에 대해 그들의 온고한 의지로 생각을 정립하고 방침을 세운다. 당신이 그들을 설득하려 해도 그들은 이해하지 않는다. 당신이 그들에게 감정을 사용하려 해도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은 지식 안에도 있지 않고 감정 안에 도 있지 않고 의지 안에 있다...

 

 

모셔온글.....

출처 : 베다니사랑과 복음- 평신도 교회
글쓴이 : 본향그리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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